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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leis Jul 18. 2023

동네 관찰

문득 이 사람들, 이 동네의 사람들을 더 잘 관찰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정신적으로는 아직도 한국에 사는 것처럼 느낀다해도 나는 엄연히 여기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사는 동안에는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야 한다. 나는 뉴질랜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데이터를 얻어야한다. 외면하는 동안 시간은 가고 있다.


동네 사람들을 자주 마주치진 않는다. 하지만 우리집은 도로가에 있어 창문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고양이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관찰하기 좋은 대상이다. 그들은 고양이에게 눈길이 팔려있다. 그들은 야옹 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이 폰을 꺼내들고 고양이를 찍는 동안 나는 눈으로 그들을 찍는다.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사람들은 행복해한다. 고양이의 눈매도 부드럽고 나른하다. 요즘 먹을 걸 안줬더니 나에겐 그런 눈빛을 더이상 보내지 않는 저 회색 고양이, 이젠 마주치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안할 무심한 표정을 짓지만 나는 그게 낫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차피 정해놓고 밥을 줄 수 없다면 자꾸 문앞에서 기다리게 만들면 안 된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고양이는 끼니를 놓칠 수 있다.


이 동네에서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음인데 굉음을 내며 작은 도로에서도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지라 싫어하는 주민들이 많지만 민원을 넣어도 몇 년째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저녁이면 각각의 집에 따뜻한 오렌지빛의 불이 켜지고 1층 부엌 창문가에 사람들이 나타난다. 묘한 기분이다. 관찰하려면 나 또한 창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즉 관찰하려면 관찰당해야 한다. 꽤 평등한 조건이라 마음에 든다. 이사온 초기엔 도로가로 넓게 트인 창이 신경쓰였으나 지금은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서로 보고 보이는 게 이웃이거니 하고 포기하는 거다.


누가 이사를 오고 가는지, 누가 어디 사는지 대충 파악이 된다. 도로 건너편에는 작은 보트를 가진 아시안들이 새로 이사를 왔다. 우리 라인에는 한국인 가족과 사모안 가족이 산다. 우리 뒷 라인에는 어떤 할머니가 뜰에 꽃을 가꾼다. 나이가 아흔이 넘으셨다고 들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정원에 애정을 갖고 있다. 내가 보기엔 그저 잡초와 꽃이 섞인 뜰일 뿐이지만 할머니에겐 소중한 garden이다. 그 앞에서 조심성없이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할머니의 경고에 의해 물러난다. '내 정원의 꽃들이 망가지니까 여기서 공놀이하지 말고 저리 가라'  얼마전 길을 지날때 기대없이 눈길을 돌렸다가 할머니의 뜰 한가운데에서 장미를 발견했다. 작은 묘목이었지만 분명 장미였다. 나는 즉시 사랑에 빠졌다. 주위의 이름모를 꽃들 가운데 그것은 특별한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자리가 톱날같은 잎사귀와 당당한 가시를 갖춘, 신비스럽게 피어난 대여섯 개의 붉은 장미 송이들,  누가봐도 장미는 할머니 정원의 정수였다. 어쩌면 할머니는 그 장미를 통해 그것이 정원임을 공고히 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다른 꽃들에 비해 할머니의 쌈짓돈이 조금 들었을 것 같은, 뜰 가운데 홀연히 자리잡은 그 장미를 보며 나도 그런 정원을 갖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이층 창문 근처에서 서성이는 할머니의 모습은 꽤 자주 포착된다. (아마도 거길 올려다보는 나도 자주 포착되겠지). 할머니의 창가에는 한동안 노란 피카츄 인형이 놓여있더니 요즘은 인형뽑기 기계에서 건질만한 이름 없는 인형들이 놓여있다. 가끔은 빨간 하트모양의 쿠션도. 그것들은 할머니의 서성거리는 실루엣을 조금이나마 감추어주고 있다. 바깥 관찰, 동네 관찰은 그녀의 주된 일과중 하나인 듯 하다. 실제로 그녀의 집은 그것에 알맞은 위치에 있다. 그리고 나는 예전에 그녀의 바로 옆집에 산 적이 있다. 바깥에 무슨 일이 생기면 - 예를 들어 집 근처에 모르는 자동차가 세워져 있거나 하면 그녀는 이웃들의 문을 차례로 두드린다. ‘혹시 이 차 주인을 알아요?’


나는 코로나 락다운의 여파로 그녀와 이웃의 정을 나누진 못했다. 비록 그것은 다른 이웃들과도, 코로나가 잠잠해진 뒤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지속적으로 신경이 쓰인 것은 그녀가 심심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할머닌 심심해서 동네를 관찰하는 것일까. 떠돌고 있는 삶의 순간들을 붙잡으려는 것일까.


이 동네는 특별할 게 없고 매일 비슷하기 때문에 할머니는 더 열심히 관찰해야 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내가 자신을 롤모델로 삼으려한다는 사실까지도 아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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