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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leis Aug 30. 2023

작은 불운

남편이 출장을 다녀왔다.

다신 헤어지지 않을거야 라고 말한다.

밖은 너무 위험해

네 곁이 가장 좋은 곳이란 걸 알았어.




남편은 출장간 당일 전화에서 내 기억으로 대여섯번을 ‘너무 힘들어’ 를 반복했다

새로 합류한 팀을 만나러 간 출장이었는데 10명중 세 명을 제외하곤 키위, 즉 뉴질랜드 원어민이었다고 한다.

리스닝이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이곳 뉴질랜드 영어는 발음과 억양면에서 독특하다.

일례로 영어 철자 e 발음만 해도 여러번 나를 당황하게 했는데. seven 은 씨븐, eight 은 아잇, pen은 핀, 곰 bear는 비어이다. 어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무리들이 내게 손에 ‘비어’를 들고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기에 학생들이 웬 술이야 하며 마지못해 허락했는데 그들이 내 손에 올려준건 귀여운 곰인형이었다. 그때서야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Merry Christmas!라는 인사는 ‘미리 크리스마스!’ 이런 식이다. 정치인들은 일부러 이런 발음을 채택하여 국민들의 정서에 호소하는 듯하다. 오클랜드는 덜한편인데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그들만의 방언을 접하게 된다.


아무튼 남편은 하루종일 그들과 액티비티및 회의를 하면서 안그래도 짧은 영어실력으로 원어민 리스닝까지 해내느라 진이 빠져버린 듯했다.

너무 피곤하다며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겠다고 다시 전화가 왔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샤워부스에서 미끄러져 넘어졌다. 집의 샤워부스와는 달리 바닥이 약한 경사가 져 있었고, 미끄러웠다. 다행히 팔로 벽을 지탱하고 미끄러져서 부상은 덜했으나 어깨와 다리등 여기저기 탈이 났다. 설상가상 비행기까지 연착하여 늦은 밤 집에 돌아온 남편은 하루사이에 살이 쪽 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번일로 남편의 입장도 쉽지 않구나 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옷도 못갈아입을 정도로 아파하는 걸 보니 안쓰럽지만 나에겐 또 한가지 문제가 있다.


부동산에서 3개월에 한번씩 집 점검을 나오는 인스펙션이 낼모레다. 남편이 하루정도 반차를 내서 같이 필요한 일들을 하기로 했었는데. 쉽지 않게 되었다. 이번 인스펙션 청소도 이렇게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구나. 온 집안을 샅샅이 청소해야 한다. 아이들은 학교와 알바를 오가느라 바쁘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젤 한가해보인다. 꼭 해야한다는 생각이 없다면 청소를 하더라도 이런 마음은 아니었을텐데. 청소하기가 싫다.


남편을 원망할 순 없겠고, 다음엔 좀 더 운이 좋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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