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피아노 연습을 두 번 했다. 한번은 아침을 먹고나서고 두번째는 점심을 먹으러 나가기 전. 책꽂이에서 찾아낸 이루마의 When the love falls 와 모차르트 소나타 12번이다. 3달에 한번 부동산에서 나와 집 상태를 점검하는 인스펙션에 대비하여 책꽂이 주변을 청소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루마의 악보, 그것은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것이라 원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꽤 괜찮은 버전이었다.
한때 이루마의 곡들을 좋아했었다. 멜로디가 아름다워서 즐겨 치곤 했다. When the love falls 라는 제목과 곡은 정말 잘 어울렸다. 오늘 찾아보니 그 곡은 처음부터 왜 그리 익숙하게 들렸는지 알것 같았다. 어떤 드라마에 삽입되었다고 하고, 원곡은 프랑스 노래인데 Qui a tué grand-maman?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 라고 한다. 원곡을 들어봤더니 랄랄라라라라 하는 부분이 어릴때 많이 들어본 것 같다. 이루마가 작곡한 건 줄 알았을 땐 이루마가 천재인줄 알았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별로 변함은 없지만.
이루마 작곡이 아니란 걸 알고 나니 그저 내 맘이 좀 편해졌다는 것 뿐이다. 왜냐면 그 곡을 칠 때 나도 모르게 맘대로 치는 습관이 있어 이래도 되나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인데 그 아름다운 선율만 지켜낼 수 있다면 반주가 조금 달라지는 것쯤은 상관 없을 것 같아서. 음악가 시모어 번스타인씨에 의하면 좋은 음악에는 inevitable flow가 있다고 하는데 이 곡은 그것이 매우 잘 느껴진다. 어쩔 수 없는 흐름, 자연스럽게 가는 느낌 말이다. 그래서 한번 치면 몇 번씩 반복하게 되는 영원한 도돌이표의 향연.
그리고 나서 최근 정신차리고 다시 연습하는 모차르트 소나타 12번. 이루마의 곡을 치다보니 모차르트에서도 더 서정적으로 표현해보게 된다. 그러면 또 색깔이 달라진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어려웠던 부분이 쉬워진다. 그리고 연습에 빠져들게 되고, 나는 모차르트에게 묻는다. ‘이정도면 만족하시겠어요?’ 모차르트는 등을 돌려버린다. 하지만 아기천사들은 내 주위에서 그래도 잘했다고 좋다고 박수를 쳐주는 것 같다. 만약 내가 작곡가인데 내 곡을 어떤 이가 몇 백년이 지난후에도 잊혀지지 않게 계속해서 연주해준다면 그가 어떻게 치든 어떻게 망쳐놓든 상관 안 할 것인가? 아마도 아니다. 미안해요. 그래도 저는 이 곡을 즐기고 있어요. 어차피 어떻게 못하시잖아요. 이미 내 놓은 곡인걸..
작품이 세상에 나오면 해석은 독자의 몫이 된다고 한다. 나는 적어도 창작자의 의도와 그때 느꼈을 그의 감정과 생각을 상상해보는 독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꺼이 춤을 추는, 그가 외면하든 말든 상관없이 계속해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성실한 한 인간이다. 이 성실함에 반해 나에게 제대로 치는 법을 귀뜸해주지 않겠어요?
그런데 글을 쓰게 된 것은 다른 이유이다. 나는 모차르트의 곡을 열심히 연습하고 즐기면서 그 자체로 기쁨과 만족을 얻기도 했지만 더 좋은 것은 그 다음에 찾아왔다. 그 충족감으로 세상과 대면했을 때 더 자신감있어지고 더 당당해지는 나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이 그 포인트다. 물론 연습에서 형편없는 결과를 얻어 자괴감에 휩싸였다면 그 반대의 결과를 얻었을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자신의 연주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을 잠시 접어놓고 아름다운 곡과 대면하는 즐거움을 충분히 느꼈다면 그렇다는 얘기이다. 왠지 모르게 취미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업시킬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당당해지고 더 대담해진다. 왜일까. 나라는 사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부분 한가지를 갖고 있는 것, 나의 취향, 나의 열정, 연습과정에서의 발전이 나라는 사람 전반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도록 스스로 허용한 것이다.
작곡가들은 곡을 창작함과 동시에 시간을 창조한다. 그 곡이 가지는 고유한 시간, 고유한 장소까지도 창조한다. 필연적으로 배경과 인물이 있다. 피아노 곡 하나에는 한 사람만 들어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여러 성부가 있고 각자가 나올 타이밍이 있다. 피아노 연주를 하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가상의 지휘자가 있고, 작곡자가 있고,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청중도 있다. 그 청중이 조용히 내 방 한구석에서 연주를 듣는 한 사람일수도 여러명의 친구일수도 객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일수도 있다. 나같은 경우에는 천사들이 합세해 멜로디를 흥얼거리거나 각자의 악기를 들고 연주한다. 그리고 들어주고 박수를 쳐준다. 대개의 경우, 작곡자들은 등을 돌리고 고뇌에 빠져있거나 모든 걸 잊고 다른 곳에 가서 즐기고 있다. 바흐는 처음엔 지휘봉을 들고 각 성부를 조율하는 듯하다가 중간도 가기전에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어디론가 가버리기 일쑤고, 쇼팽은 너무 바쁘다. 글렌 굴드, 그는 처음엔 흥미롭다는 듯 앉아있지만 역시 시간낭비였다는 듯 조롱하는 하품을 하며 사라진다. 모차르트, 그는 참을성있게 들어주었지만 이미 등을 돌린지 오래다. 이제 다시 그들을 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맘씨좋은 아기천사분들이 있다. 그들은 내 주위를 날아다니며 혹은 방바닥에 잠시 앉아 재잘거리며 듣기 좋다고 응원해준다. 그래, 한 사람이 오케스트라를 대신하는 일이 그리 쉽겠는가. 피아노는 오케스트라다. 그 생각을 가지면 곡을 칠 때 멜로디에만 집중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어떤 곡들은 멜로디만 부각하고 나머지를 사라지게 하면 곡의 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
아마도 나와 같이 아마추어로서 피아노 연주를 즐겼던 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어보면서 뒷받침할 근거를 찾아야겠다. 아마추어로서 피아노 연주를 생활화하는 것의 정당성과 효용이 어떻게 삶속에 나타날 수 있는지 말이다.
이루마 - When the love falls
https://youtu.be/cAZow0_3moA?si=dTxRLgxB7TQS2oYT
Michel Polnareff - Qui a tué Grand-Maman
https://youtu.be/0OJJZzrrIqQ?si=8Xi_imXl8WlBVjR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