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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다 김 Jun 05. 2020

미국 요가 선생의 따뜻한 이야기

미국 요가 수업 엿보기

내가 미국에서 요가 선생이라고 했을 때 요가를 모르는 사람은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과 중동에서 온 남자 말고는 모두 요가를 알고 있었다. 또한 여성들에게 요가 팬츠는 이제 운동복이 아니라 하나의 패션으로 자리 잡아 나이에 상관없이 입는 패셔너블한 편안한 옷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요가는 “일종의 종교다”, “요가하는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다”, “요가는 프레첼처럼 몸을 꼬고 뒤트는 운동이다”, “요가는 여자들이 하는 운동이다”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요가를 종교의식으로 행하지 않으며,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프레첼처럼 몸을 비틀지도 못하고 한때 내 수업에는 남자가 더 많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모든 요가 선생들을 그런 시각으로 보지 않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쩌면 요가가 댄스보다는 순하고, 피트니스에 가서 혼자 땀 흘리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하는 소속감이 있어 좋고, 스포츠처럼 수치로 금방 결과를 내지 않아도 되니 심적으로 편할 뿐만 아니라 요가 선생들이 요가 포즈나 가르치면 좋겠는데 호흡에 집중하라느니 마음의 평화, 고요를 느끼라느니 내면에 집중하라 하고,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껴라 등 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해대니 남자들로서는 여자들에게나 딱 맞는 운동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요가가 단순히 몸만을 스트레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쓰지 않았던 근육을 사용하고 불편한 자세를 취함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렵고 때로는 짜증 나는 힘든 자세를 통해 우리는 수용(Acceptance)을 배우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힘을 키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정신과 몸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많은 남자들이 요가 포즈 하나하나를 터득해가며 자신의 몸을 알아가는 재미에 빠지고 수련의 깊이에 놀라움을 표현한다. 더 이상 나는 몸이 유연하지 못해서, 요가는 연약한 사람들이 하는 운동이라서 라는 편견으로 요가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 분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요가를 메인 잡 (Main job)으로 전환하고 미국 사회에서 요가를 가르치면서도 한편으론 한국인 요가 선생으로 나를 알리고 한인 커뮤니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던 중 어느 날 도서관에 가니 한 달 동안의 이벤트가 게시판에 적혀 있었다. 내용을 보니 건강, 교육, 영양, 직업 선택, 유언, 유산 남기기 등의 다양한 소재로 구성되어 있었다.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이벤트를 할 수 있나요?

“네가 이벤트 프로젝트를 써서 내면 도서관 기금 후원회에서 보고 결정해서 알려 줄 거야. 내가 양식을 줄 테니 내용을 다 쓴 후 나에게 다시 갖다 주렴.”

친절하게 안내를 해줬다. 종이를 가져와 무슨 내용으로 이벤트를 할까 고민하는데 요가는 너무 흔하고 이벤트로서 특성이 없으니 내가 잘하는 것은 ‘크게 웃는 것’ 그래서 요가 앞에 ‘웃음’(Laughter)을 넣어 ‘웃음요가’를 하기로 결정하고 계획서를 제출하였다. 일주일 후 결정 났다는 메일을 받고 도서관에 가 보니 도서관 게시판에 내 이름과 ‘Laughter yoga’가 광고되고 있었다. 이 동네엔 한국사람들이 많이 사니 한국인들이 많이 와주기를 기대하며 토요일 오후에 이벤트를 시작하였다. 2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매우 궁금한 얼굴로 참여하였는데 의외로 참가자 명단에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도서관 매니저의 인사말과 내 소개가 있은 후 모두 의자에 앉아 약간의 요가 동작을 한 후 수업을 시작하면서 말하였다.

“ 우리 뇌는 진짜 웃겨서, 좋아서 웃는 것과 가짜로 웃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가짜로 웃어도 뇌에서는 엔도르핀(Endorphin)이라는 좋은 호르몬을 많이 배출하여 스트레스 수치를 낮춰준다. 우리가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다 보면 행복해진다는 것을 오늘 증명해보자. 그리고 웃음은 매우 전염성이 강하다. 행복의 바이러스를 옆 사람에게 전해주자. 자, 그럼 모두 일어나 10명을 만나 악수하며 하하하하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자.” Let’s go!!

내가 먼저 돌아다니며 악수를 하면서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낯선 사람들과 악수를 하며 웃는다는 게 멋 적은 지 쭈뼛거리던 사람들이 나의 호탕한 큰 웃음소리에 따라 웃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특히 남미 사람 몇 명과 흑인 두 명이 분위기를 리드하며 잘 웃었다. 게임을 하고 요가 동작을 하면서 이유 없이 1시간을 웃어댔다. 멕시칸 여자의 마스카라가 번져 너구리가 된 것을 보고 또 배꼽을 쥐며 웃다가 이벤트가 끝났다. 마치 마라톤을 달린 양 몸에서 열이 나면서 배까지 고팠다. 나름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이날 참여했던 세 명의 참가자가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시니어 센터’에 찾아가 매니저를 수 차례 만나 “Laughter Yoga’ 수업을 개설해 달라는 끈질긴 요청을 한 것이었다. 이 시니어 센터는 내가 몇 달 전에 들러 수업 요청을 했으나 모든 수업이 꽉 차서 더 이상 수업을 늘릴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당했던 곳이어서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전례 없이 수업을 점심시간에 새로 개설하여 오픈해 주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현재 7년째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 내가 아주 부자들이 사는 동네에서 요가를 가르칠 때 이상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몇 명의 학생이 전혀 무표정한 마네킹 얼굴을 하고 요가를 하는 것이었다. 어떤 순간에도 웃는 법이 없었고 수업이 끝난 후에도 Thank you, Bye! 할 때도 표정 없이 말을 하고 가니 내 수업이 싫어서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에 수업할 때마다 스트레스가 쌓였다. 즐겁지 않은 학생을 가르치려니 너무 힘이 들고 도대체 상호교류(Interaction)가 일어나지 않는 수업이었다. 그 학생들을 보는 것조차 힘이 들어 차라리 수업에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어찌 된 일인지 꼬박꼬박 수업에 참석하였다. 너무 스트레스가 쌓인 어느 날 내 수업에 뭐가 문제인지 진단받기 위해 그동안 했던 수업 내용과 시퀀스를 프린트해서 내 요가 스승을 찾아가 상담을 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수업 내용을 샅샅이 살펴본 후 스승은 답을 주었다.

“리다야, 내가 네 수업 내용과 시퀀스를 보니 잘못된 부분이 없다. 내 생각에는 네가 수업하고 있는 동네가 부촌이다 보니 네 학생들 몇 명은 보톡스를 심하게 맞았거나 얼굴 리프팅을 지나치게 해서 그런 거 같다. 그래서 얼굴 표정이 없을 수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내용이라 쉽게 믿기지 않았다. 다음 수업이 있을 때 사무실에 들러 매니저에게 학생들의 무표정에 대해 물어보니 가끔 그런 학생들이 있다면서 이제야 알았냐며 ‘깔깔깔’ 웃어댄다. 그제야 마음이 놓이고 그 학생들을 마음 편하게 대하게 되었다.






또 나에게 첫 개인지도를 받았던 학생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고위 간부였는데 처음 만났을 때 큰 키와 몸의 앞, 뒤, 옆이 둥그런 Round body에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나타났다. (나는 동화책에  나오는 거인이 다리가 이픈 줄 알았음) 카이로 프락틱, 피지컬 세러피, 침 등을 경험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해 고민하던 중 닥터로부터 요가를 해보라는 조언을 듣고서 나랑 연결이 되었다. 처음에 그를 보고 과연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의심조차 들었지만 나아지려는 그의 강한 의지와 함께 무엇보다 나에 대한 신뢰가 강했다. 물론 나를 소개해 준 사람에 대한 믿음 덕분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며느리가 한국인으로 한국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었다. 그의 아들이 대학에서 영어도 그닥 잘 못하는 한국인 유학생을 보고 반하여 마침내 결혼을 했다는데 그때까지 그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다. 며느리 덕에 한국도 다녀왔고 사돈 되는 사람들에게 황송한 대우를 받고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한국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돌아온 후 완전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과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집 거실에서 수업을 했는데 거실 중앙에는 아들과 한국인 며느리, 손자, 손녀의 사진이 큼직하게 걸려 있고 그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해외로 출장 가는 일 외에는 절대로 요가 수업에 빠지지 않고 일주일에 세 번씩 1년 반을 같이 수련했다. 그 와중에 그는 Retire를 했고 마침내 건강한 모습으로 두 다리로 저벅저벅 걸으며 아들, 며느리가 사는 캔자스로 이사를 갔다. 그는 이삿짐을 싸면서 자신을 걷게 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로 나에게 큰 TV와 DVD Player 그리고 그의 아내가 예쁜 모자를 만들어 선물했고 나는 몰래 찍어 둔 사진으로 손이 발까지 닿는 그의 요가 포즈 사진을 액자에 넣어 선물로 주었다. 지금도 캔자스 거실에 자신의 사진을 걸어놓고 요가를 잘하고 있다고 문자를 보낸다. 전혀 알지 못하는 캔자스에 사는 그의 한국인 며느리 덕분에 나는 1년 반을 그와 요가 수련을 서로의 신뢰 속에서 재미있게 수업할 수 있었다. 내가 한국인으로서 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큰 덕행을 베푸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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