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림 라시드 전시회 in 한가람 미술관
파리바게뜨 오 생수병, 옥수수수염차 병, 메쏘드 주방 세제 용기, 가르보 쓰레기통…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모두 일상 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인데요. 정답은 카림 라시드(Karim Rashid). 산업디자인 분야의 세계적 거장으로 평가받는 카림 라시드가 디자인한 제품들입니다. 최근 한국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면서 라시드와 그의 작품 세계가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나이 불문, 세대 불문, 디자인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조차 호평을 받고 있는 '세계 3대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전', 보다 펀(fun)하고 편안한(easy) 전시회 현장을 찾았습니다.
키 195 센티의 장신에 흰색이나 핑크색을 고집하며 화려한 디지팝 패턴으로 장식된 옷을 입고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카림 라시드. 그가 디자인한 작품들은 우아한 곡선과 독특한 아이콘, 과감한 색채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이번 전시회는 작가 30년 인생을 돌아보는 회고전이며 아시아에서 열리는 첫 대규모 전시입니다. 단지 산업디자이너의 면모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창의적인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집트 카이로 출신의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는 1993년 개인 디자인 스튜디오를 시작한 이후 아우디, 소니 에릭슨, 시티은행, 파비앙, 3M, 움브라, 알레시, 보날도 등 세계 각국 400여 개의 유수의 기업들과 함께 디자인 작업을 해왔습니다. 국내에서는 한화, 애경, 삼성, LG, 현대카드 등 주요 기업들과 협업하여 감각적이면서 실용적인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활동 초기의 디자인 스케치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해 준 ‘가르보 쓰레기통’을 비롯한 각종 생활용품, 예술적 창의성이 드러나는 설치작품 등 모두 350여 점이 전시됩니다.
전시 구성은 ‘카림의 이야기’(Karimstory) ‘삶의 미화’(Beautification of Life) ‘글로벌 러브 홀’(Hall of Globalove) ‘스케이프 속으로’(Into the Scape) ‘디지팝’(Digipop) ‘대량생산의 시대’(Era of Mass Production) ‘인류를 위한 사명’(Mission for the Humanity) 등 7개 주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삶의 미화 (Beautification of Life)
전시회의 도입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작품입니다. 이 의자는 2012년 핀란드 가구 회사 마텔라를 위해 디자인한 쿱 의자입니다. 마치 달걀을 연상시키는 모습이 인상적인데요. 작가는 쿱 의자를 자궁과 같은 공간으로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부드러운 구조의 이 작품은 앉는 사람에게 고요함과 편안함을 선사하고 자기에게만 보장된 공간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평온한 환경에서 인간은 더 높은 생산성을 발휘한다고 하는데요. 쿱 의자는 휴식의 공간이 될 뿐만이 아니라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비니지스 공간에도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줍니다.
단순하면서도 감각적인 이 작품은 2002년 캐나다의 가구회사 니앤캠퍼와 함께 디자인한 블롭 의자입니다. 작가와 니앤캠퍼사는 이 작품 양 옆에 전시되어 있는 파장 의자나 커브 의자 등 오랫동안 다양한 협업을 해왔습니다. 작가는 '어빈 S. 이워스 Jr'의 SF 영화 더 블롭을 보고 블롭 프로젝트를 올렸다고 합니다. 직선 요소가 없는 우주 생명체의 유기적인 형태가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인데요. 무엇보다 작가는 미니멀리즘이 꼭 기하학적 형태로 만들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추장스러움 없이 단순해야 한다는 작가의 가치관이 이 작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두 개의 꽃잎이 이어져있는 형태를 하고 있는 이 의자는 2006년 프랑스의 주류 브랜드 뵈브 클리코를 위해 디자인한 작품입니다. 커플이 서로 마주 보며 앉는 르네상스의 러브시트를 감각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인데요. 이 작품은 돌아가는 프로펠러와 같은 역동적인 유기체를 연상시킵니다. 또 사람의 가슴이나 관능적인 인간의 신체를 떠올리게 합니다. 작가는 칵테일바 같은 곳에 두 명의 낯선 남녀가 서로 수줍게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이 의자를 구상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샴페인이 그들을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는 장면도 봐겠지요. 감성적이고 시적인 오브제를 디자인하고 싶었던 작가의 철학이 러브시트에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이 작품은 지난 30여 년간 작가가 존경해온 이탈리아의 기업 자노타와의 협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카림 라시드가 추구하는 곡선의 미가 뚜렷이 잘 살아있는 쿠치 소파는 작가 본인이 직접 본 작품의 전시를 선정한 만큼 애착이 남다른 작품입니다.
작가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움'과 '기능성'을 동시에 갖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식탁 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금병, 후추병이라말로 가장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하는데요. 작가는 한 쌍의 양념통에서 사랑하는 남녀를 떠올렸습니다. 흑백의 컬러를 사용하고 메탈로 마감하면 더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1995년 자신을 대표하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90년대 초 뉴욕에서 홀로 서기를 시작한 젊은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에게 기회를 준 대표작입니다. 소금 후추 쉐이커는 10년이 지난 후에도 베스트셀러 일만큼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요. 작가가 특히 아끼는 이 컬렉션은 현재 여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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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러브 홀(Hall of Globalove)
이번 전시회를 대표하는 설치작품입니다. 작가는 2014년 이탈리아 목재 가구 명가인 니바1920과의 협업에서 3미터 높이의 웅장한 '글로벌 러브 카림 라시드 두상'을 만들었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한국 전시 기획 초기 단계부터 필수 작품으로 꼽았는데요. 한국 전시를 위해 특별히 새로운 글로벌 러브를 만들었습니다. 관객들은 마치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조형물의 내부로 들어가 작가가 직접 만든 음악의 한복판에 서게 됩니다. (라시드 옹은 디제잉이 취미라고 합니다;) 내부에는 한성재 작가가 제안한 인테리어와 음향, 조명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신비로운 렌티큘러 작품들입니다. 2012년 미국 뉴욕 카림 라시드의 렌티큘러 컬렉션인데요. 이 컬렉션은 고도의 렌티큘러 기술이 집약된 최대 20장의 2D 이미지를 결합하여 평면에 360도의 움직임을 구현해냈습니다. 회화와 조소, 프린트 기술과 디지털 기술의 혼합물이며 애니메이션적인 요소도 엿볼 수 있습니다. 작가는 본 작품을 가능케 한 오늘날의 기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랫동안 세상은 이차원적으로 디자인되었고 이것은 삼차원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3차원적인 도구로 만들어진 역동적인 4차원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스케이프 속으로(Into the Scape)
플레져이스케이프. 관객들에게 포토존으로 자리매김한(!) 작품인데요. 이 작품은 한국 전시회를 위해 국내 욕실 자재 전문기업 세턴바스와 협업해 만들어졌습니다. 특수 소재인 액상 아크릴을 이용해 경계가 없는 세계, 비정형의 새로운 풍경을 만들었습니다. 파도가 넘실대는 듯한 모습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팽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관객들은 신발을 벗고 올라가 앉거나 누우면서 작품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몸에 닿는 차가운 아크릴의 재질과 미끈하면서 우아한 곡선의 형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생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2008년 이탈리아 라미네이트 제작업체인 아베트 라미나트의 최신 기술을 이용해서 육각형 콘셉트 하우스를 선보였습니다. 본 작품은 밀라노에서 첫 선을 보였고 많은 관람객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시간에 따라 벽에 장착된 빛의 색이 변하면서 공간의 분위기가 바뀌는데요. 이 작품 또한 자유롭게 앉거나 만지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번 한국 전시회에서는 새로운 패턴으로 더욱 화려하고 신비롭게 구성한 헥틱 스페이스가 선보였습니다
디지팝(Digipop)
작가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디지털 시대의 예술로 '디지팝(Digipop)'을 제시합니다. 이 작품들은 70여 개의 아이콘과 옵티컬 아트, 기하학적 패턴 등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특히 작가가 지난 30년 동안 개발한 아이콘들은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작가의 무명 시절, 자신의 작품에 이니셜을 남기듯이 아이콘 모양을 남긴 것이 시초라고 합니다. 아버지 쪽으로는 이집트의 후손이기도 한 작가는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카림 라시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식이란 소통을 위한 것이며, 살아가는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고, 물질과 오브제에 깊이를 더해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활기 넘치는 디지팝으로 가득 찬 유토피아가 될 때까지 작가의 작업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대량생산의 시대(Era of Mass Production)
전시 후반부에는 플라스틱의 시인이라고도 불리는 카림 라시드의 대표적인 산업 디자인 제품들이 선보입니다. 오우 의자는 특히 재미있는 사연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었는데요. 이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선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당시 그가 디자인한 가르보 쓰레기통이 미국 내에서만 수백만 개가 팔려나갔습니다. 이는 미국인들이 저렴한 가격의 디자인을 원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죠. 가르보의 성공과 더불어 작가는 감각적이면서 기능적이고 그러면서도 예술성을 갖춘 작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작가는 뉴욕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요. 유난히 불편했던 의자는 결국 식사 도중 부서졌습니다. 작가는 스튜디오로 돌아오자마자 좀 더 편안하면서도 획기적인 디자인을 갖춘 의자를 디자인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오우 의자가 탄생했습니다. 의자는 십 수년 동안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색상으로 출시되었습니다. 오우 의자는 현재 대중적인 공산품이라고 하기엔 다소 가격이 높은 편인데요. 단순히 의자로서의 가치를 뛰어넘은 의자로서 지난 2000년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의 영구 소장품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과감한 곡선과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엄청난 인기를 끈 ‘가르보 쓰레기통’입니다. 전설적인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의 이름을 따 1996년 만들어진 이 휴지통은 10년 동안 700만 개 이상 팔렸습니다. 카림 라시드의 대표작이며 그의 상징이기도 한 작품인데요. 이 쓰레기통은 현재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가르보 쓰레기통이 미술관에 소장된 것보다 사람들의 집이나 일터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의미 있다고 말합니다.
작가가 파리바게트를 위해 디자인한 오 생수병은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작품입니다. 이 생수병의 디자인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섭취물 중 하나인 비타민 알약의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동시에 오(O) 심벌은 삶의 윤회를 상징합니다.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오 생수병은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오 생수병의 성공으로 우리나라에서 사소한 물건이라도 획기적인 디자인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카림 라시드의 방대한 작품 세계 속에는 ‘디자인 민주주의’라는 철학이 녹아 있습니다. “대중이 가장 많이 소비하는 디자인이 가장 좋은 디자인”, “디자인은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그의 말처럼 누구든지 스스로의 삶을 디자인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시회는 그가 직접 디자인한 것인 만큼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여러 체험형 작품들이 전시회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카림 라시드전-디자인 유어셀프(Design Your Self)'는 오는 10월 7일까지 예술의 전당 내 한가람 미술관 1층에서 열립니다. 관람료는 성인 14000원.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는 21시까지 연장 개관되어 더욱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습니다. 평일 하루에 4번 공식 도슨트의 전시 해설이 진행되니 꼭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주요 작품들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명쾌한 해설을 들을 수 있습니다.
Design Your Self. 이번 전시회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디자인, 나를 바꾸는 디자인을 꿈꿔보는 것은 어떨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