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버린 사랑.
보들레르 <지나가는 여인에게>
지금은 철 지난 말이 되었지만, 한때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짐)'라는 인터넷 신조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금사빠는 말 그대로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좀 비꼬는 뉘앙스이다. 초면의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라... 좀 황당한 구석이 없지 않지만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실제로 주위에서 종종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은 대개 두 갈래로 나뉜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VS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유경험자이거나, 그 같은 극적인 상황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충동적이고 감정에 쉽게 휩쓸린다는 평을 듣기 쉽지만, 그만큼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 사랑이란 곧 거리낌 없는 몰입 그 자체인 것 같다. 상대에게서 어떤 끌림을 감지하는 순간 그들은 사랑을 느끼고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다.
후자의 사람들은 몰입하는 것보다 상황을 주시하고 통제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놓고 끊임없이 저울을 기울인다. 사랑에 빠져도 좋다는 결론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취미, 약점, 귀여운 면모, 희망사항, 과거의 어떤 열정이나 상처까지도.
전자와 후자의 경우를 두고 어느 쪽이 좀 더 현명한 것이지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사실 사랑은 '이성'이나 '현명함' 같은 단어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다. 이성적인 것은 후회를 가장하기 좋고, 현명한 것은 바보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그냥 바보가 되는 것이 좋은 걸까, 아니면 후회하더라도 저울을 기울인 시간과 수고를 존중하는 것이 나을까.
사랑에 관하여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것이 바보처럼 보일 수 있겠다. 마치 훌륭한 감상자라도 된 듯이 떠들어대다니, 외면당하기 딱 좋은 모습이다. 그런데 자기 사랑의 감상자가 되는 일은 어떨까? 자신의 경험을 재료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놓고 들여다보는 일 말이다. 여기에는 결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특히 그가 시인이라면, 솔직하고 대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여기에 시인 보들레르가 그린 강렬한 그림이 있다. 제목은 '지나가는 여인에게'이다.
<원문>
A une passante
- Charles Baudelaire
La rue assourdissante autour de moi hurlait.
Longue, mince, en grand deuil, douleur majestueuse,
Une femme passa,? une main fastueuse
Soulevant, balancant le feston et? ourlet;
Agile et noble, avec sa jambe de statue,
Moi, je buvais, crispe comme un extravagant,
Dans son œil, ciel livide ou germe? ouragan,
La douceur qui fascine et le plaisir qui tue.
Un eclair... puis la nuit!? Fugitive beaute
Dont le regard m’a fait soudainement renaitre,
Ne te verrai? je plus que dans? eternite?
Ailleurs, bien loin? ici! Trop tard! Jamais peut-etre!
Car j’ignore ou tu fuis, tu ne sais ou je vais,
O toi que j’eusse aimee, o toi qui le savais!
<번역>
지나가는 여인에게
- 샤를르 보들레르
주위에선 귀가 멍멍해지게 거리가 노호하고 있었지
상복 차림의 날씬한 여인이 엄숙한 고뇌의 모습으로
꽃무늬 레이스와 치맛자락을 화사한 손으로
살짝 쳐들며 흔들며 지나갔었지.
조상 같은 다리로 민첩하고도 고상한 걸음으로
나는 머리가 돈 사람인양 부르르 떨며
태풍이 싹트는 납빛 하늘 같은 그녀 눈에서
넋을 빼는 감미로움과 쾌락을 마셨어.
번갯불....... 그리고 어둠! 그 시선이 홀연
날 되살려놓곤 한순간에 지나친 미녀여,
영원한 저승이 아니고는 다신 못 볼 것인가?
딴 곳, 아득히 멀리! 이미 늦었지! 아마 영원히 못 만나리!
그대 사라지는 곳 나 모르고 내가 가는 곳 그대 알지 못하니,
오 내가 사랑할 수도 있었을 그대, 오 그것을 알고 있던 그대였거늘!
시를 깊숙이 들여다보자. 화자는 19세기 파리의 번잡한 도심 한복판을 걷고 있다. 사륜마차의 둥근 바퀴가 작은 돌들을 튕기며 달려가는가 하면 그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며 욕설을 내뱉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갈 길이 바쁘다. 어떤 이는 미소를 짓고, 어떤 이는 매우 화가 나서 동행인에게 말을 지껄이고, 어떤 사람들은 거래를 하고, 어떤 무리들은 피켓을 쳐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혼란을 이리저리 뚫고 튀어나온 소년이 갓 인쇄된 신문을 움켜쥐고 외친다. “호외요, 호외!”
왜 인지는 모르지만, 화자는 무척 예민한 상태이다. 귀에 들리는 온갖 불협화음이 그의 신경을 긁어놓는다. 그가 신경을 쓰든 말든 거리는 물살처럼 흐르고 또 흘러간다. 바쁜 사람들과 달리 홀로 느리게 걷고 있는 화자는 마치 튀어나온 돌 같다. 그의 주변에서 거리의 유속이 잠시 느려진다. 다시 가속하며 쩡ㅡ하고 뺨과 귓바퀴를 넘어간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의지를 가지고 부딪혀오는 소리에 화자의 정신이 멍멍해진다. 아, 거리가 노호하고 있다!
소리가 그를 삼켜버린 것일까. 그가 스스로 소리의 장벽 속에 갇히고 만 것일까. 노호하는 거리는 화자의 감각이 빚어낸 꿈같은 현실이다. 화자는 알지 못할 예감에 사로잡혀 거리를 응시한다. 순간 한 여인의 또렷한 상이 나타나고, 그를 지배했던 소리는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다. 사라진 소리. 여인은 화자의 구원자인가?
생각을 채 떠올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 버린다. 여인의 화사한 손과 치맛자락, 꽃무늬 레이스, 조상(彫像) 같은 매끈한 다리... 이런 것은 차라리 화자의 눈동자에 뒤늦게 맺힌 잔상에 가깝다. 모든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간다. 시간을 멈추게 한 것은 오직- 기적 같은 시선 교차이다. 화자는 떨면서 그의 시심(詩心)에 의해 단 한번 열린, 태풍이 싹트는 납빛 하늘을 바라본다. 여인의 눈동자 속에서, 싹튼 태풍 속에서 한줄기 번개가 내리친다. 찾아온 어둠. 달아나는 여인이여!
화자는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여인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거리의 군중 속으로 섞여 들어간 것일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만 비슷한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다. 혹시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이런 식으로 다시 볼 수 없게 되다니! 순간 찾아온 깨달음이 화자를 현실로 되돌려놓는다. 가장 먼저 인지한 변화는 균열이다. 마음일 수도 있고 내면의 풍경일 수 있는 어떤 것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사랑에 대한 감미로운 예감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자각으로 인해 빛을 잃는다. 상실에 대한 뼈아픈 자각이 그것이다. 놓쳐버린 여인을 다시 찾을 길은 없다.
그녀를 다른 장소, 이를테면 모임의 응접실에서나 극장 안에서 만났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움직이는 거리는 기약을 허락하지 않는다. 흐름 속에 놓인 이상 밀치거나 밀려나갈 뿐이다. 그토록 지나가는 여인이기에 화자는 그녀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영원한 저승이 아니고는 다신 못 볼 것인가' 단 한 번의 짧은 눈 맞춤으로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었던 순간. 화자와 이름 모를 여인의 강렬한 순간을 사랑이라 정의한다면, 그것은 미처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버린 사랑이었다.
시 <지나가는 여인에게>는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 중 2부 <파리 풍경>에 수록된 시이다. <악의 꽃>은 보들레르의 자기 고백(폭로?)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만큼 고통과 환멸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읽는 독자들은 정신건강에 유념해야 한다. 이 시는 건전한 편에 속하지만 그럼에도 시인의 격렬한 감성이 곳곳에 드러나있다. 그는 여인과의 짧은 눈 맞춤에서 쾌락과 감미로움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며 이러한 개인적 체험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이다. 이 시를 여러 번 읽다 보면 나 자신도 시인의 격렬함에 전염되는 느낌이 든다.
보들레르가 사랑을 느낀 지나가는 여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내 하드에 저장되어 있는 그림 속의 여자들을 골라보았다. 아래 그림은... 내가 상상한 '지나가는 여인'이다.
James Tissot _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