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끝에 위치한 섬

[섬토리텔링] 가파도, 마라도, 그리고 이어도

by 지리는 강선생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시작과 끝을 마주합니다. 특히 해외 여행을 하면서 국경을 넘을 경우 국가의 끝을 경험하고, 육지의 끝에 서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드넓은 바다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내가 발 딛고 선 이 땅의 경계를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끝’이라는 단어에서 마침표를 떠올리지만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치 졸업을 뜻하는 영어 commencement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처럼요. 마찬가지로 육지의 끝은 바다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입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국가로서 대륙으로 진출하기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어 사실상 섬나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그럼에도 대한민국 영토의 범위를 나타내는 4극은 헌법을 기준, 즉 한반도 전체를 포함해서 명시하는 것이 옳습니다. 대한민국의 최북단은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면 풍서리, 최서단은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 최동단은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떠나볼 최남단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에 위치한 마라도입니다. 국토의 남쪽 끝이면서 세계라는 더 넓은 바다로 뻗어 나가는 출발점으로 떠나봅시다.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png 대한민국 최남단 섬 마라도



가장 낮은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을 바라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운진항은 마라도와 가파도로 향하는 배를 타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항상 북적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가파도행 배에 올랐습니다. 사실 가파도는 마라도만큼 유명하지 않습니다. 마라도로 가는 중간에 위치해 있어 자칫 마라도의 경유지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가파도 역시 마라도 못지않게 지리적 특성과 독특한 매력을 지닌 섬입니다.


배에서 보는 가파도는 마치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팬케이크처럼 평평합니다. 실제로 가파도는 대한민국 유인도 중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섬으로 최고 해발고도가 겨우 20m에 불과합니다. 가파도는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 말기(약 70만 년 전에서 90만 년 전 사이)에 형성되었습니다. 당시 분출한 점성이 낮고 유동성이 큰 현무암질 용암이 지표를 따라 넓고 얇게 퍼져나가면서 거대한 용암 대지를 형성했습니다. 이후 수십만 년 동안 파도의 쉼 없는 침식 작용으로 섬의 가장자리가 깎여 나가면서 지금의 평평한 형태의 섬이 완성되었습니다.

배에서 바라본 가파도.jpg 배에서 바라본 가파도


가파도 상동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여행자를 반기는 것은 줄지어 서 있는 자전거들입니다. 가파도는 걸어서 한바퀴 돌기에 충분히 작은 섬이지만 자전거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도는 경험도 한번쯤 해볼만 합니다. 저 역시 자전거 한 대를 빌려 페달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오르막이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을 따라 달리면 사방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온몸을 감쌉니다.


봄이면 섬 전체가 넘실대는 청보리 물결로 뒤덮여 장관을 이룹니다. 자전거를 멈추고 잠시 섬의 중심부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에는 가파도에서만 볼 수 있는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바다 너머 제주도의 산방산과 송악산, 그리고 그 뒤로 1950m의 한라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낮은 섬인 가파도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한라산을 바라보는 것, 이 극적인 고도 차이는 가파도가 아니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시각적 체험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낮은 섬 가파도 3.jpg 가파도에서 바라본 제주도의 모습


가파도의 마을길을 걷다 보면 나지막한 돌담 너머로 주민들의 소박한 일상이 볼 수 있습니다. 거센 바람을 피하기 위해 지붕을 아주 낮게 올린 집과 집마당마다 놓인 소라 껍데기들이 이곳이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터전임을 말해줍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마주한 그 평화로운 풍경 뒤에는 척박한 섬 환경을 일궈온 주민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낮은 섬 가파도 2.jpg 가파도의 소박한 돌담길



대한민국의 남쪽 끝


가파도를 뒤로하고 저는 다시 배에 몸을 실어 더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파도가 점점 거세지는 것을 느끼며 30분 남짓 나아가니 수평선 위에 깎아지른 듯한 수직 절벽으로 둘러싸인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드디어 대한민국의 최남단 마라도에 도착했습니다.


마라도는 약 15만 년 전에서 25만 년 전 사이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에 일어난 화산 활동의 결과물로 제주도의 수많은 부속 도서 중에서도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이 섬은 점성이 낮은 현무암질 용암이 겹겹이 쌓여 형성되었습니다. 마라도의 해안은 오랜 시간 태평양의 강력한 파도가 깎아 만든 수직의 해식애(Sea cliff)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배에서 내려 방파제에 발을 딛는 순간 거대한 해식 절벽이 눈 앞을 가로 막습니다.


방파제 옆으로 난 가파른 계단을 따라 섬 위로 올라서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 한 그루 없이 지평선까지 시원하게 뻗은 약 10만 평의 드넓은 초원이 나타나는 것이죠. 마라도는 섬 전체적으로서쪽으로 완만하게 기울어진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거센 해풍 때문에 키 큰 나무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 자리를 억새와 잔디가 대신 채우며 특유의 이국적인 평원 경관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이 국토 최남단의 섬에 도착하자마자 여행자를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다름 아닌 ‘짜장면 집’입니다. 마을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온통 짜장면집 간판이 즐비합니다. '대한민국 최남단 짜장면', '원조 마라도 해물 짜장' 등 저마다 원조를 내세우는 식당들이 호객 행위를 합니다.

원조 짜장면 시키신 분.jpg
마라도 원조 짜장면.jpg
특허받은 마라도 해물 짜장면 원조집


이 기묘한 풍경의 시작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한 이동통신사 광고가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개그맨 이창명이 철가방을 들고 외쳤던 그 한마디, “짜장면 시키신 분~!” 이 광고는 대한민국 어디서든, 심지어 국토 최남단 마라도에서도 통화가 잘 터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이었지만, 이 광고 이후 마라도는 전 국민에게 ‘짜장면의 섬’으로 각인되어 버렸습니다.


광고가 나간 후 실제로 마라도에 와서 짜장면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나자, 하나둘 식당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제는 톳과 해물을 듬뿍 넣은 마라도식 짜장면이 섬의 대표적인 관광 상품이자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저 역시 톳이 올라간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켰습니다. 사실 짜장면 맛 자체가 엄청나게 특별하다기보다는 이 먼 섬까지 짜장면이 배달될 것만 같은 그 상상을 하며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톳과 멍게가 올려진 마라도 짜장면.jpg 톳과 멍게가 올려진 마라도 짜장면


짜장면으로 배를 채우고 섬의 가장자리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걷습니다. 섬의 남쪽 끝자락에 다다르면 마침내 대한민국 최남단 비를 마주하게 됩니다. 검은색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비석에는 ‘대한민국 최남단’이라는 일곱 글자가 선명하고 묵직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북위 33도 06분 40초. 이곳은 행정구역상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영토가 마침표를 찍는 아주 특별한 지점입니다. 또한 이곳은 땅의 마침표인 동시에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가는 대한민국 바다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과 맞닿아 있다는 말을 국토 최남단비에서 두 눈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국토 최남단비.jpg 마라도의 국토 최남단비


비석을 지나 섬의 동쪽으로 걷다 보면 독특한 건축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마라도 성당입니다. 전복 껍데기나 달팽이를 닮은 듯한 이 성당의 외관은 섬의 거센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몸을 낮춘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뾰족한 첨탑과 웅장한 규모의 성당과는 대조적으로 마라도 성당은 섬의 풍경을 방해하지 않는 작고 겸손한 규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당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거센 바람 소리가 일순간 차단되며 정적이 찾아옵니다. 성당 내부는 아담하지만 장소가 주는 평온함은 유럽의 어느 성당보다 따뜻했습니다. 저는 그곳에 잠시 앉아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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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를 닮은 마라도 성당



한번 보면 돌아갈 수 없는 섬


몇 해 전 저는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펙이라는 도시에 있는 캐나다 인권 박물관(Canadian Museum for Human Rights)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인류의 인권 역사를 다루는 그 방대한 박물관의 한 코너에서 저는 뜻밖에도 아주 익숙하고도 구슬픈 멜로디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여도 사나, 이여도 사나…”


그것은 제주도 해녀들이 거친 바다에서 물질하며 부르던 노동요, '이어도 타령'이었습니다. 머나먼 타국, 그것도 바다와는 거리가 먼 캐나다 내륙 한복판에서 들려오는 해녀들의 노래는 저의 발길을 한참이나 붙잡았습니다. 박물관은 제주 해녀들의 강인한 삶과 그들의 공동체 문화를 인권과 여성의 관점에서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 거칠고 고단한 삶 속에서 해녀들이 그토록 애타게 불렀던 이어도는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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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들의 노동요 이어도 사나


제주 사람들에게 이어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온 전설의 섬이었습니다. 뱃사람들이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들이 이어도에 갔다고 믿었습니다. 그곳은 굶주림도 없는 풍요로운 낙원 ‘유토피아(Utopia)’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곳은 한 번 가면 다시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섬이기도 했습니다. 해녀들은 고된 물질을 하며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 남편이나 아들을 바다에 잃고 슬픔에 잠길 때, '이어도 타령'을 부르며 고단함을 달래고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럼 이 전설 속의 섬 이어도는 실제로 존재할까요? 네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섬은 아닙니다. 이어도는 마라도에서 남서쪽으로 무려 149km나 떨어진 먼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수중 암초입니다. 이어도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평균 해수면보다 약 4.6m 아래에 잠겨 있습니다. 평소에는 절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죠.

수중암초 이어도.jpg 수중 암초 이어도와 해양과학기지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어도를 섬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여기에는 아주 과학적이면서도 슬픈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어도가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거대한 태풍이 몰아쳐 높이가 10m가 넘는 집채만 한 파도가 칠 때입니다. 옛날 뱃사람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태풍을 만나 사경을 헤매다 거친 파도 너머로 바위섬을 보았을 것입니다. '드디어 육지다! 살았다!'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죽음의 문턱에서 마주한 암초였습니다. 그렇게 이어도를 본 사람은 대부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고, 이어도는 ‘한번 보면 돌아갈 수 없는 섬’이 된 것입니다.


2003년 대한민국은 이 수중 암초 위에 거대한 해양 구조물을 세웠습니다. 바로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입니다. 바다 한가운데 40m 높이의 철골 구조물로 우뚝 선 이 기지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해양 과학 기술력과 주권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축물입니다. 이곳에는 연구원들이 상주하며 태풍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고, 해류와 수온 변화를 관측하며 기후 변화를 연구합니다. 이어도 기지가 보내오는 데이터는 우리나라의 기상 예보 정확도를 높이고 해양 재난에 대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특히 이어도는 태풍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향후 진로를 예측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이어도의 위치.jpg 이어도의 위치


무엇보다 이어도 과학기지의 존재는 해양 영토와 주권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습니다. 비록 이어도 자체는 영해를 가질 수 없는 암초이지만, 이곳은 대한민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EZ)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 역시 자신들의 관할 해역이라고 주장하며 호시탐탐 이 해역을 노리고 있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이곳에 과학기지를 건설하고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은 이 바다가 대한민국의 관할 해역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대한민국의 남쪽 끝 섬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 위에서 다시금 한라산을 바라봅니다. 가장 낮은 섬 가파도에서 바라본 한라산은 여전히 높고 위엄 있습니다. 가장 낮은 섬 가파도에서 시작해 국토 최남단 마라도, 그리고 전설의 섬 이어도에 이르는 여정은 대한민국의 남쪽 경계를 확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마라도 최남단 비석 앞에 서서 바다의 끝을 실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도 해양과학 기지를 떠올리며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의 주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