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춘천고등학교에 발령받아서 첫 출근을 한 지 1시간, 그리고 2학기 새로운 담임으로 나를 소개한 지 불과 1분 만에 학생에게서 들은 첫 번째 말이었다. 허벅지에 꽉 달라붙은 교복 바지에 펑퍼짐한 하얀 후드티를 걸치고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학생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지금 너무 아프니 병원을 가야겠다면서 아버지가 학교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얼른 조퇴를 시켜달라며 아직 자리 정리도 채 하지 못한 초임 교사를 재촉했다.
그래도 학생 아버지께 확인 전화를 해봐야겠다며 학생의 전화를 건네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는 학교 종소리,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그리고 중년 남성의 목소리로는 절대 믿기지 않는 앳된 고등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학생 아버지의 목소리가 동안일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지 혹시 지금 어디신가요?" 예상치 못한 나의 질문에 자신을 고등학생의 아버지로 주장하는 그는 "어디긴 회사죠!"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그 어이없는 한마디로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학생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확신했고, 전화를 끊은 후 바로 사자후를 외쳤다. "야이 새끼야 어디서 첫날부터 담임한테 구라질이야?"
시커먼 10대 후반 남학생들이 우굴거리는 남고는 바로 직전에 근무하였던 여고의 분위기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춘천고등학교에 온 첫 해 나는 한 교실에 43명이 모여있는 대규모 학급 담임을 맡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도 한 반에 그렇게 학생 수가 많지는 않았었는데, 20년이 지난 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길목에 두고 있는 2017년 학교 교실 한 반에 43명이라니!
더군다나 어디 가서 키나 덩치로 절대 밀리지 않는 편인데, 우리 반 학생들의 평균적인 신체 사이즈는 나를 수렴했다. 그런 거구들이 100여 년 전에 설계된 조그만 교실에 43명 씩이나 몰려있다니! 처음 교실에 들어설 때 마치 군대 내무반에 처음 들어갔을 때처럼 숨이 턱 막히며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특히 교실의 책상 가운데 줄은 책상을 가로 네 줄씩 배치해놔서 혹여나 학생이 수업시간에 화장실을 가려면 마치 비행기 이코노미 좌석 가운데 앉은 승객처럼 옆사람을 밀치며 힘겹게 자리를 빠져나와야만 했다.
학생들은 이미 한 학기 동안 서로 친해져 있었고, 나는 2학기에 새로 왔으니 우선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힌 후에 얼른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첫 주부터 학생들과 한 명씩 가벼운 상담을 하면서 친해졌다. 43명의 학생들을 한 명씩 상담하다 보니 남고 학생들도 겉보기와는 다르게 꽤나 순수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다. 특히 인문계반이어서 그런지 진로를 예체능으로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한때 디자인을 전공하려고 준비하다 포기했던 만큼 특히 예술 쪽으로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들을 상담할 때면 마치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리만족이라도 하듯이 공감하며 상담했다.
2학기가 시작된 지 2주 만에 고등 래퍼에 나간다며 자퇴를 한다는 학생과 상담할 때는 "지금 네가 학교와 자퇴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을 가사로 한 번 써보고, 숙려기간이 지나서 학교에 올 때 내 앞에서 거기에 랩을 한 번 해봐라!"라고 시키기도 했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고 또 성과도 좋지만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과민성 대장염 때문에 힘들어하는 학생을 상담할 때는 "나도 학교 다닐 때 성적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예민한 성격 탓에 힘들었다."면서 그것을 극복한 내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알려주기도 했다.
어느덧 첫 담임을 맡은 학생들과 이제는 꽤나 친해져서 43명이 가득한 교실이 더 이상 답답하지 않았다. 아직 수컷 냄새가 좀 많이 나고, 교실이 정말 심각하게 지저분하긴 하지만, 정글 같은 남고 교실도 그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고, 또 우락부락한 남고생들도 마치 용감한 형제처럼 소녀소녀 한 감성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다.
빼빼로 데이날, A4용지 한 장에 우리 반 학생들이 한 명씩 검은색 펜으로 갈겨쓴 롤링 페이퍼에는 '제 빼빼로가 가장 크지요'라고 자신의 신체부위를 자랑하고 있는 민망한 글만 쓰여 있었을 뿐, 정작 나에게 빼빼로는 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학생들 나름대로 담임 생각해서 무언가라도 선물해줬다는 게 기특할 뿐이었다.
무사히 한 학기를 마치고 겨울 방학 보충수업까지 모두 끝난 날, 우리 반 학생들을 데리고 피시방에 왔다. 나는 '배린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우리 반 아이들의 놀라운 캐리 덕분에 치킨을 먹을 수 있었다.
남고의 수업과 여고의 수업은 또 달랐다. 초반부터 나의 작은 몸짓이나 말투, 억양에도 넘치는 리액션이 나왔던 여고의 수업과는 달리, 남고에서는 그런 반응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과 주고받는 상호작용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만큼 학생들의 적절한 리액션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남고생들의 반응은 내 기대에 한참 모자랐다. 가끔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속으로 웃는 건지 아니면 웃음을 참는지 피식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문득 단 6개월 간이었지만 여고에서의 경험이 오히려 남고에서는 독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일단 학생들의 리액션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접었다. 그리고 말투와 억양도 여고에서처럼 나긋나긋하지 않고, 보다 강하게 바꿨다. 또한 수업할 때 사용하는 표현과 등장하는 썰의 수위와 강도도 한층 높였다. 그렇게 수업에 대한 지속적인 변화를 하다 보니 남고생들과의 코드가 조금씩 통하기 시작했고,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수업의 방법도 여고에서는 스토리텔링을 위주로 하면서 중요한 핵심 개념을 마인드맵화해서 정리해주는 편이었는데, 남고에서 이렇게 수업을 하니까 학생들은 그냥 멍하니 수업만 쳐다보고 웃다가 수업을 끝마쳤다. 나는 학생들을 위해 그날 진행할 수업 내용을 체계화해서 우선 정리했고, 그 내용을 순서대로 개조식으로 판서하며 수업을 했다. 가끔 필요한 이미지나 지도는 스크린에 띄웠고, 그 사이사이는 나의 '썰'들로 빈틈을 메꿨다. 그렇게 수업 방식을 바꾸니까 남자 학생들도 점점 내 수업에 적응을 했고, 지리 과목에 흥미를 느끼는 학생이 늘어갔다.
담임 업무와 수업 준비 외에도 학생부 학교폭력과 흡연 음주단속 업무를 맡았다. 학생부에 출근한 첫날, 내가 처음 본 풍경은 10명이 넘는 남학생들이 담배에 쩔은 냄새를 풍기면서 엎드려뻗쳐있는 모습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수도 없이 일산화탄소 측정기로 학생들의 흡연 여부를 측정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고, 주말에 술을 마시다가 성인과 싸움이 붙은 학생들을 처리하는 것이 월요일의 업무가 되는 날도 종종 있었다.
이렇게 학생부 업무를 하다 보면 정작 수업 준비와 담임 업무 시간이 많이 부족하고 또 힘들기도 했지만, 학생들을 지도하고 또 상담하며 오히려 학생들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받기도 했다.
자기 스스로를 너무 싫어하고,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을 하던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나는 이 우울한 학생을 다그치거나 바꾸려 하거나 적절한 기법을 활용하여 상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얘기를 그저 들어주고, 말이 없으면 지나가면서 머리 쓰다듬어주고, 또 힘들어하면 그냥 꼭 안아줬다. 사실 그 학생이 뭘 그렇게 잘하거나, 칭찬받을 만한 일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저 사소한 것에 공감해주고, 기특해하고, 또 칭찬해줬다.
그렇게 1년 간 조금씩 밝고 긍정적으로 변화한 그 학생은 3학년이 되어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말 밝고 긍정적인 학생이 되어있었다. 물론 이것이 전부 나의 노력 때문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밝게 웃으며 나에게 인사하는 그 학생을 봤을 때 정말 많은 뿌듯함이 밀려왔다.
매사에 신경질적이고 세상을 향한 분노가 가득한 학생도 있었다. 많은 선생님들이 그 학생을 싫어했고, 그 학생 역시 선생님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았다. 나는 그 학생을 학교폭력업무를 담당할 때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 학생은 자신의 잘못은 절대 인정하지 않고, 모두 다른 것에 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도 많이 부정적이었는데, 처음엔 수업에서 나를 마주했을 때도 이유 없는 불만과 분노를 표출했었다.
그 아이의 모습에서 역시 세상에 대한 이유 없는 강한 분노와 반항을 표출하던 고등학생 시절 나 자신을 봤다. 나는 그 학생이 불쌍했고, 고등학교 시절 나 자신이 측은했다. 그래서 그 학생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물론 그 학생은 처음에는 나를 무시하거나 혹은 차가운 냉소를 지으며 비웃으며 지나갔지만, 나는 몇 개월간 그 학생을 향한 인사를 멈추지 않았다.
계속 그러다 보니 그 학생도 어느샌가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인사가 고개를 숙이며 하는 예의 바른 인사가 아니라, 그저 한 손을 삐딱하게 올리면서 '어이!' 하며 마치 친구들을 부르듯이 나를 부르는 인사였지만, 나는 그 학생의 버릇없음을 지적하기보다는 그저 나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다는 것에 만족을 했다. 그렇게 그 학생과는 복도에서 만나면 서로의 이야기를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다음 해 스승의 날, 그 학생이 나한테 편지를 툭 던지고 간다. 그 편지에는 고등학교 기간 동안 만난 사람 중에자기한테 가장 따뜻하게 대해줬고,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면서 삐뚤빼뚤하지만 진심과 고마움이 담겨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마치 20년 전의 나에게 받은 것 같아서 마음이 더 뭉클해지고 감동을 받았다.
처음 학생을 만나는 날, 나는 학생들에게 90도로 인사를 먼저 한다.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는 학생들에게 그 인사의 의미는 학생들인 너희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한다. 학생들이 있어야 학교가 있고, 그래야지 나 같은 선생님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고마움을 담아서 이야기한다. 물론 이런 90도 인사와 나의 말이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전달될지 아니면 그냥 색다른 이벤트로 기억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것이 내가 학생들을 대하는 진심이다.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학생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학생들은 공부를 잘하고, 말 잘 듣고, 성격 좋고, 착한 학생들일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진짜 선생님이 필요한 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의욕이 없고, 표정이 어둡고, 우울하며, 말투도 버릇이 없거나 아니면 아예 말이 없는 그런 학생들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진짜 선생님이 필요한 학생들을 위해서 에너지를 많이 쏟는 편이다. 그래서 공부 잘하고, 착하고, 말 잘 듣는 그런 학생들에게 가끔씩은 조금 미안하다. 그래도 나의 이런 자그마한 노력이 선생님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전달되어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변화한다면 그것만큼 기쁘고 짜릿한 보람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