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지정학, 일본의 지정학, 중국의 지정학
대한민국은 서·북 방면으로는 상임이사국이자 핵보유국이며 경제력, 군사력에서 세계 2위로 꼽히는 중국과 러시아와 접해 있고, 동·남 방면으로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해상 강국이자 세계 3위의 경제대국 일본을 마주 보고 있다. 또한 북으로는 비록 경제력은 볼품없지만 비공식적 핵보유국이며 군사력만큼은 무시하기 어려운 북한이 자리 잡고 있다. 특이 남과 북은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며 군사적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한반도의 상황은 한국은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 세계 10위권을 상회하는 최상위권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으로는 자국보다 더 강력한 국가들에 둘러싸인 완충지대의 일부로 분류된다. 스파이크 맨의 림 랜드 이론에서 한반도는 림 랜드 영역에 들어가는 상당히 중요한 곳으로 분류된다.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한반도는 흔히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각축장으로 표현된다. 대륙 세력이란 곧 중국을 의미하며, 중원 대륙에 자리했던 수 많던 국가들이 모두 한반도를 두고 다툼을 벌여 왔다. 반대로 해양 세력은 1945년 이전까지는 일본, 이후로는 미국을 의미하며, 삼국통일전쟁과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네 가지 사건들이 주목할만하다.
세계사적으로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끼인 폴란드의 지정학과도 비교할 수 있다. 일본을 독일, 중국을 러시아, 미국을 영·프, 만주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에 비교하고, '대륙 세력'을 서방 세력으로, '해양 세력'을 동방 세력으로 치환하면 들어맞는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동유럽을 통일하고 모스크바를 위협했던 것은 고구려나 발해가 만주를 지배하고 중원 대륙과 몇 차례 총력전을 벌였던 것에 비교할 수 있으며, 네 차례의 폴란드 분할과 항전의 근현대사는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떠올리게 하며, 특히 20세기 내내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으로 주인이 바뀌며 고토의 일부를 영구 상실한 것 역시 한반도계 국가의 분단된 상황과 만주에의 영향력 상실에 대입해볼 수 있다. 서방세계의 일원이며 강경한 친미 스탠스를 고수하면서도 독일 중심으로 돌아가는 EU의 의사 결정체제를 반대하고 서구적 가치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태도를 유지하는 것 역시, 친미국가지만 일본과의 지역 공조에 부정적이고 권위주의 문화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한국의 상황과 유사하다.
한편, 역사적으로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중 하나가 반도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했을 때는 보통 패권을 상실한 국가를 향해 공세가 벌어졌다. 대륙 세력이 한반도 전역을 장악했던 원 간섭기에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벌어졌으며, 해양 세력이 한반도 전역을 장악했던 일제강점기에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벌어졌다. 반면 양 세력이 힘의 균형을 이루던 시기에는 대체로 한반도 내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며, 삼국통일전쟁을 포함하여, 일본이 전국시대를 거치며 강성해져 명을 정복한다는 명문으로 대륙 세력의 영향권이던 조선을 길로 삼으려 했던 임진왜란, 중화인민공화국이 한반도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몰아내려고 해양 세력의 영향권이던 한국을 적대하며 참전한 한국전쟁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때문에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은 모두 한반도 내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을 경계한다.
사실 제국주의 시대까지만 해도 열강은 일본이나 중국에나 관심이 있었지 한반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서양 열강들은 군사적이나 전략적으로 중요하거나 자신들이 필요하고 수익성이 있는 설탕을 만들기 위한 사탕수수나 향신료를 대거 재배할 수 있는 기후와 토지 조건을 갖춘 플랜테이션 가능한 열대지역을 식민지로 둘 필요가 있었다. 부동항을 간절하게 원하는 러시아가 아니면 한반도는 그다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대항해시대 서양 입장에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이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은 서양 문물을 매우 늦게 접했다.
1980년대 말 일본 경제는 말 그대로 '세계를 몽땅 사들이고' 있었다. 소니가 영화사 콜럼비아 픽쳐스를 인수하고, 미쓰비시가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록펠러 빌딩을 구매했을 때는 일본에 대한 미국의 감정은 혐오를 넘어 두려움으로 변하였다. 세계 시가총액 100위 기업 중 대다수를 일본 기업이 차지했고, 일본의 이런 어마어마한 성장은 세계 경제를 호령할 수 있게 만든 일본의 성공 조건이 무엇인지 주목하게 했다. 일본식 모델은 철저하게 해부되었고, 일본학이라는 유례없는 학문도 서양 세계에 등장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일본식 모델의 인기는 일본 경제가 한순간에 침체에 빠지면서 빠르게 식었다.
1980년대 초반 일본은 소련의 확장주의를 경계하는 한편 경제성장을 지속해야 했기에 1952년부터 존속되어온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더욱 강화하려 했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일본과 미국이 운명 공동체임을 언급한 데에는 일본을 미국의 확고한 동맹국으로 만들어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목소리를 키워가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다. 하지만 일본이 안보를 확보한 대가로 미국과의 무역 갈등과 그로 인한 플라자 합의, 그리고 소련의 붕괴 등이 연달아 일어났고, 결국 1990년대 초반 버블이 붕괴되면서 일본 경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전략적, 경제적 측면에서 동아시아는 일본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러시아와의 쿠릴 열도 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본 군대가 한국과 중국에게 저질렀던 범죄 행위는 아직도 양국에 상처로 남아있다. 따라서 두 국가는 일본의 민족주의 부활을 경계하기 위하여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같은 과거를 지우고 미화하려는 일본 정치인들의 망행이 있을 때마다 격렬하게 반응한다. 또한 자국 경제의 부상과 더불어 아시아 무대의 전면에 나서길 원하는 중국의 야망은 중국과 일본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요소이다. 중국이 일본의 UN 안정 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가입을 거부한 것도 두 국가 관계에 악영향을 미쳤고, 두 국가 간의 영토 분쟁(센카쿠 열도/댜오이 댜오) 문제도 중국의 대일본 희토류 수출 금지와 같은 무역 전쟁으로도 이어졌다.
1868년 일본은 문호를 개방하면서 유럽의 모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945년 전쟁에서 패하면서 미국과의 경제적, 지정학적 균형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미국은 반세기 동안 일본의 가장 큰 무역 상대국이었다. 일본은 미국과의 거래에서 막대한 흑자를 남겼고, 그 일부를 미국의 적자를 메우는 데 재활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미국과의 상호 의존성은 오늘날 세계경제에서 중국이 부상함으로써 무너졌다. 전략적 측면에서 보면 1952년 미국과 체결한 조약이 일본 안보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나 일본 헌법은 군사력을 상당히 제한하고 있다. 바로 옆 북한의 위협, UN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가입 등 중요한 현안들 무엇도 미국의 도움 없이는 달성할 수 없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과의 관계를 집착한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마오쩌둥은 농민들이 지지하는 군대를 지휘하며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표방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했다. 당이 곧 국가인 체제에서 사회를 통제하는 계획경제를 실시했다. 이러한 정책이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곧 경제는 침체되었다. 그는 두 차례의 계급투쟁으로 나라에 활력을 불어 넣으려 했다. 이는 1957년 대약진운동으로 진화한 백화 운동과 1966년 문화혁명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많은 목숨을 잃었고 중국을 내전과 독재로 몰고 갔다. 결국 1978년 덩샤오핑이 주도한 개혁이 시대가 열렸다.
덩샤오핑의 개혁은 초기 농업이 집중되었다. 집단농장 체제를 해체하고 토지를 개인에게 돌려줌으로써 자유로운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러한 이윤이라는 자극제를 도입하니 농촌인구의 생활수준이 개선되고 소비도 증가하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계획경제의 권위적 방식을 국가행정의 일부를 지방으로 분산시키고 이중가격제를 도입하여 시장에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불법거래, 부패,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였고, 이는 결국 1989년 톈안먼 사전의 시발점이 되었다.
1990년대 실시된 개혁은 무역 개방, 민간 부문 확대, 외국인 직접투자 및 시장 메커니즘과 제도의 도입이 중심이 되었다. 중국의 이러한 개혁은 자유주의로 포장되었지만 시장은 여전히 강력하게 보호된 상태였다. 위안화는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은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한편, 2001년 중국이 세계 무역기구에 가입하면서 관세보호장벽을 낮추고 해외자본에 대한 시장개방을 확대하라는 압력이 커졌다.
21세기를 맞아 중국은 경제성장, 국내 투자와 해외투자, 수출 호조와 무역수지 흑자, 다국적 기업의 중국 진출 등 다방면으로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그러나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저임금, 지역 간 불평등, 사회 양극화 현상, 정치적 긴장, 높은 에너지 의존도, 세계의 보호주의적 반응, 온실효과 등의 부작용도 뒤따르고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을 2004년 16.8%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한 이례로 10%에 육박하는 성장을 거듭해왔고, 국내총생산 규모도 7위에서 4위, 현재는 미국을 턱끝까지 추격하는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무역흑자는 이미 2005년에 1000억 달러를 넘었고, 유럽연합과 미국이 강요한 중국 섬유쿼터제나 2005년 7월에 단행한 위안화 평가절상에도 불구하고 중국 수출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멈출 생각이 없다. 미국과 유럽 연합은 중국에 대해 완전 변동 환율제를 시행하지 않으려면 위안화에 대한 실질적 가치평가를 하라며 압박을 가하고 있다.
중국은 내부적 균형을 유지하면서 높은 경제성장률과 다자주의를 내세워 국제무대로의 화려한 복귀를 꿈꾼다. 19세기 서구 침략자들에 이어 20세기 일본에 당했던 모욕, 구소련 붕괴 등을 겪으며 생겨난 강한 정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중국 지도자들에게 강한 실용주의 사상을 심어주었다. 2001년 중국의 세계 무역기구 가입은 다중심적으로 재편된 세계질서 속에서 중국이 자국의 이익 강화를 위해 국제관계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중국이 거대하게 성장할수록 미국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타이완 문제는 여전히 불안 요소이며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중국 정부는 '일국 양구' 원칙에 따라 타이완을 중국 본토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였고, 같은 시기 미국과 일본은 군사관계를 강화하고 타이완을 공통의 전략적 몰표에 포함시켰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뒤이은 이라크 침공은 중국 외교당국이 동맹관계와 에너지 수급원을 다자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 계기였다. 중국은 유럽연합을 미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할 세력으로 판단하고 프랑스를 비롯한 몇몇 회원국과 호혜관계를 맺었다. 인도, 브라질과도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 아랍세계와의 무역 거래량도 대폭 늘리고 있다. 또한 천연자원 수급원일 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품의 시장이기도 한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와의 관계 활성화에도 힘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