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마이단, 크림반도, 돈바스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중세 키예프 공국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같은 동슬라브어 계통 언어를 쓰고 정교회를 믿었으나 키이우 공국 멸망 후에는 서로 다른 역사를 걸어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지방이라고 인식한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가리켜 "처음부터 러시아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 우크라이나인을 가리켜 "러시아인"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시각에서는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와 역사적, 혈통적, 언어적, 문화적, 경제적으로도 밀접한 관계이고, 결국에는 러시아의 품에 들어오게 해야 할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현재 러시아와 관계를 끊고 영향력을 줄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대체로 드네프르강의 기준으로 동부 및 일부 남부 지역은 친러 성향, 서부와 중부는 친서방 성향을 나타난다. 과거에는 두 세력이 비슷하게 맞서며 정권을 번갈아 차지하며 불만과 갈등이 있어도 독립은 하지 않았으나, 유로마이단으로 야누코비치 독재정권이 붕괴, 친서방 정당들이 집권하면서 반러 정책을 펼치자 친러 지역 인구 상당수가 반발했다.
2021년 12월부터 양국 사이에서 우크라이나 위기가 일어나자 갈등이 생겼고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 국경 부근에 군대를 배치시켰다. 결국 2022년 2월 24일부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단교하였다.
2013년 11월 21일, 당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진행 중이던 EU 가입 논의를 전면 중단하고 친러 정책을 천명했다. 이에 반대하여 수도 키이우를 포함한 서부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대적 시위가 유로마이단 혁명의 시발점이다. 폭력이 동반된 정부의 강경진압과 이에 자극받은 시위대의 봉기로 시위는 유혈사태로 격화되었다.
결국 시위대와 야권은 정권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야누코비치를 탄핵한 후 새로운 친서방 과도정권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계 주민이 많고 친러 성향이 강한 크림 반도와 돈바스 지역은 유로마이단 혁명에 반대해왔고 이는 직후 일어난 2014년 크림 위기와 돈바스 전쟁에 영향을 끼쳤다.
우크라이나의 영토였던 크림 반도를 러시아가 점령한 사건이다. 러시아 측 명분은 우크라이나 정권 교체 과정에서 크림 반도의 러시아인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평화를 상징하는 올림픽인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이 러시아에서 개최되어 진행 중인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어서 세계적인 파장이 컸다. 이 사건은 2022년 2월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전초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014년 당시 크림반도의 민족 구성은 약 60%의 러시아계, 약 20%의 우크라이나계, 그 밖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러시아계의 다수는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 러시아와의 관계가 경색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보다 국민소득이 낮은 우크라이나의 경제 상황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2014년 2월 말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친러 정권이 무너지고, 친서방 성향의 우크라이나 과도정부가 구성되자 러시아는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또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NATO 가입 등 친서방 진영으로 기우는 것을 맹렬히 반대하고 있었으며, 러시아 현지 언론은 "우크라이나가 친서방으로 간다면 크림 반도는 러시아에 돌려줘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직접 무력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자 같은 날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를 러시아군의 침략이라 지칭하며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러시아의 이 같은 기만을 통해 국제 사회의 비난을 피할 수 있었고, 우크라이나 과도정부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만들어 그 대응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으며, 우크라이나 현지 민심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등 초기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갈 수 있었다.
크림 자치공화국 총리는 푸틴 대통령에게 크림 자치공화국의 안정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는 러시아가 크림반도에 군사력을 투입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이용하게 된다. 3월 1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에 무장 병력 2천 명을 투입했다. 미국은 계속 러시아의 군사 개입은 대가를 치를 것이란 입장만 반복하였고, EU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이번 러시아군 크림 반도 침공 사태에 대해 황급히 UN 안보리에 제의했으나 UN은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3월 2일, 우크라이나 과도정부는 러시아의 크림 반도 침공에 대해 "우리에 대한 전쟁 선포"라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 전군에 전투태세를 명령했으며, 병역 의무가 있는 40살 미만 성인 남성에 대해 예비군 소집령을 내렸다. 미국의 존 케리 국무장관은 러시아에게 크림 반도에 군사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으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 미국 기업의 철수와 같은 경제 제재 또는 G8에서 러시아를 제외하겠다고 경고했다.
미국도 본격적으로 대응을 개시했다. 리투아니아에 F-15E 6기가 추가 배치하였고, 폴란드에도 F-16 전투기 12기가 긴급 배치되었다. 해상에서는 미 해군 USS 조지 H. W. 부시 함을 기함으로 하는 항공모함 전단을 그리스 앞바다에 대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본토에 군사 침공을 감행했다.
한편, 3월 16일 크림반도에서 투표가 시작되었다. 크림반도 주민들은 1) 러시아로 흡수합병과 2) 1992년 헌법 체제와 지위로 돌아가는 것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는데, 실질적으로 어떤 것을 선택해도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다. 결과는 독립 및 러시아 귀속 찬반 투표가 96.77%(127만 2000명)의 찬성으로 종료되었다.
3월 24일. 우크라이나는 크림 반도에서 자국 군대의 철수를 명하였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약 10만 명 정도의 러시아군 병력이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 하르키우, 도네치크 등의 접경 지역 인근에 주둔하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크림반도와의 육상 운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으며, 현재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으로의 러시아군 병력 집결은 지난 1990년대 중반 체첸 전쟁과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을 앞둔 시점의 병력 이동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러시아는 크림 반도 합병 직후 정치, 경제 등 전 분야에 걸쳐 크림의 러시아화를 추진하고 있다.
2014년 4월, 돈바스 지역에서 발발한 친러 성향의 반군,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 정부군 사이의 전쟁이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 반군 간 교착 상태가 이어지다가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발함에 따라 친러 세력이 러시아군에 합류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은 이 지역이 러시아계가 대다수라 어느 정도 명분이 있었지만,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돈바스는 우크라이나 민족 역시 다수 거주하고 친러 성향 주민도 러시아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러시아는 군대를 직접 투입한 크림반도 합병과는 달리, 러시아를 지지하는 현지인이 스스로 들고일어나도록 부추기고 러시아는 이들 세력을 은밀히 지원하는 방식으로 사전 작업을 하였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의 특별 군사작전 개시 명령 선포 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침공한 사건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014년 발발한 돈바스 전쟁으로 대표되는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 반군 세력 사이 우크라이나 영토 내 국지적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돈바스 전쟁은 돈바스 지역의 친러 반군 세력의 힘으로는 우크라이나 정부군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라 8년간 교착 상태에 빠진 상황이었다. 이후 러시아는 돈바스를 장악하기 위한 더 적극적인 개입을 계획해 위기를 고조시켰고, 러시아가 침공하리라는 징후는 2021년 봄부터 곳곳에서 포착되었다.
러시아는 2022년 1~2월을 전후로 벨라루스, 크림반도 쪽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동남·북부 국경 전반에 걸쳐 대규모의 병력을 벨라루스와의 합동훈련 명분으로 집결시켜 본격적인 침공의 움직임을 보였다. 당시 "러시아가 전면전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국지전으로만 제한될 것이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푸틴은 이런 예상을 깨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 침공을 강행하면서 상황은 국가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도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거나 붕괴할 것이라는 세계의 예상을 깨고, 강력한 항전 의지를 드러내며 선전을 지속하였다. 반면 러시아는 세계 2위 군사 대국이라는 인식에 걸맞지 않은 부실한 허점을 드러내며 졸전을 거듭했고, 우크라이나 지원국의 무기 및 장비 지원이 가속되며 전쟁이 장기화됐다.
처음엔 사태를 관망하던 서방 및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국가들은 러시아의 고전을 목격한 후로 우크라이나에 전쟁 자원을 보내기 시작했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국제 결제망 퇴출,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취소, 러시아 은행 보유 외환 자산 동결, 러시아 국적 항공기 및 선박에 대한 영공 및 영해 출입 금지 등 적극적인 정치적, 경제적 제재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국제적인 고립 상태에 처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국가 부도의 위기에 처했다.
이 전쟁으로 브렉시트 등과 같은 회원국들의 끊임없는 반목, 국방비 축소 정책 등으로 점차 약해지고 있던 유럽연합과 NATO의 결속력이 다시 공고해졌다. 또한 독일이 발표한 1,000억 유로(약 134조 원)의 재무장 패키지 정책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대규모 군비 확장이 촉발되었다. 여기에 전 세계의 반러 감정 역시 유례없이 강해지면서 러시아는 소련 해체 후 지금껏 재건해 왔던 국가적 위상을 다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유럽 지역에서도 신냉전이라는 단어가 널리 인식되기 시작했다. 사실 신냉전이라는 용어 자체는 10여 년 전 등장했는다. 한국에서는 이미 2010년대 후반 미국-중국 패권경쟁이 본격화하면서 점차 퍼지기 시작했지만, 중국의 위협에서 비교적 안전했던 유럽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냉전이라는 단어의 적실성을 다시금 체감하게 되었다.
(1) 러시아의 입장
“우크라이나를 잃으면 우리는 머리를 잃는다(если мы потеряем Украину, то потеряем голову).”
- 블라디미르 레닌
우크라이나는 땅이 넓고 비옥해 유라시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꼽힌다. 하지만 동시에 우크라이나는 유럽인에게는 동방 진출을 위한 ‘길목’이었고, 아시아의 유목민에겐 유럽을 향한 ‘통로’였으며, 러시아인에겐 바다를 향한 ‘출구’였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13세기 몽골 침입 이후부터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오랜 기간 동안 주변 강대국의 분할 지배를 받아왔다. 이후에도 서구 열강은 우크라이나를 동방 진출의 교두보로, 러시아는 흑해를 거쳐 지중해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 인식했다. 이 때문에 대북방 전쟁, 나폴레옹 전쟁, 크림 전쟁,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의 전장이 돼 '강대국의 화약고'로 불렸다.
유럽의 지형도를 보면 동서로 뻗은 유럽 대륙의 북쪽 지역은 프랑스까지 대부분 평지지만, 남부는 카르파티아 산맥, 알프스 산맥 등이 가로막는 자연 국경이 있으며, 해상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북쪽 발트해에는 발트 3국, 남쪽 흑해에는 그리스와 터키가 있다. 발트 3국과 터키가 나토에 가입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지정학적 사정 때문이다. 반면, 나토와 러시아의 대치구도가 심화될 경우 양쪽이 모두 원하는 완충지대는 결국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 두 나라는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진 나라다. 나토 역시 이 때문에 완충지대로서 우크라이나를 두고 싶기 때문에 계속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요청을 외면해왔다고 볼 수 있다.
과거 러시아 제국, 소련에서도 우크라이나를 중시했으며, 이후 현대 러시아 연방의 푸틴이 옛 소련 영토 중에서도 유독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자국의 핵심부를 잠재적 침략 세력으로부터 가급적 멀리 떨어뜨려 놓고, 적국이 공격해 올 때 1차 방어선 구실을 할 완충지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러시아 입장에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한다는 것은 완충지대가 적성지대로 바뀜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의 직선거리는 약 750km 내외이며, 우크라이나 최북단 기준으로는 약 500km 내외에 불과하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성능 좋은 단거리 탄도 미사일이나 순항 미사일만 도입해도 즉각 모스크바에 직접 타격을 가하는 게 가능해진다. 이는 THAAD 배치 이후 중국이 경제적 타격, 대외 신용도 타격을 무시하면서 보복을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이 대한민국과 약 950km로 가깝기 때문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이전까지는 카르파티아 산맥이 있어 지상군의 이동 경로가 좁게 형성되어 있으나, 우크라이나부터는 모스크바까지 평야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우크라이나에 서방 세력이 직접적 파병을 한다면 사실상 외국군이 러시아 수도 바로 앞에 병력을 전진 배치하는, 사실상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급 비상사태와 다를 바 없어진다. 만약 우크라이나에 강성 반러 정권이 들어선 뒤 대규모 군사력을 확보한다면 서방 진영이 러시아의 급소를 확실히 쥐게 되고, 현 러시아 정부 입장에선 서방 진영에게 대단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흑해는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의 유일한 출구로서 유럽 열강으로의 국제적 지위 확보에 기여한 중요한 전략적 통로였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세바스토폴 군사 기지와 크림 반도는 우크라이나에 귀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서방화는 흑해에 대한 러시아의 접근을 제한하면서 제해권 장악을 어렵게 할 것이다. 또한 카스피해 연안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약화시켜 에너지 자원 개발을 둘러싼 열강들 간의 경쟁에서 러시아의 경제적 이권도 현저히 침식시킬 것이다.
결국 러시아의 입장에서 반 러시아 성향 우크라이나 정권을 방치할 경우 극도로 치명적인 지정학적 피해를 입게 되며, 대규모 전쟁을 감행하더라도 우크라이나를 차지하거나 친러 정권으로 바꿔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2) 서방의 입장
미국, 영국, EU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지나치게 러시아와 가깝고 지형적으로도 대부분이 평야이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지켜주기 어려운 환경이다. 또한 동유럽에 여러 나라가 있기 때문에 러시아를 견제할 나라가 우크라이나만 있는 것도 아니다. NATO의 가장 강력한 방패는 폴란드이며, 우크라이나 뒤에 있는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발트 3 국도 러시아에 적대적이다. 무엇보다 서방 세계에서 우크라이나에 파병을 한다는 것은 러시아 정권 머리에 총부리를 들이미는 것에 가깝고, 이렇게 러시아 정부를 자극하는 것을 그들도 원하지 않는다.
결국 미국, 영국, EU는 세계 대전과 핵전쟁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우크라이나에 파병할 이유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 이후대 러시아 경제 제재나 군수 물자 지원, 자발적 의용군 파병 등은 있었지만 공식적인 파병은 어느 국가도 하지 않고 있다.
국제 사회는 러시아가 과거 자신의 영향권이었던 주변 국가들에게 다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을 '전 러시아 주의'로 불리는 팽창주의로 해석한다. 푸틴은 지속적으로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부인해 왔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그의 생각은 2022년 2월 21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드러났다. 해당 연설에서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꼭두각시 정권이 이끄는 식민지"라 지칭하고 우크라이나인을 "러시아인"이라고 부르면서 우크라이나 국가 자체를 부정했다. 즉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대등한 독립국으로서 외교 관계를 갖고 교류할 의지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의 모태인 키예프 공국은 러시아와 벨라루스까지 세 동슬라브 국가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라는 땅은 러시아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지역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위치했던 키예프 공국을 자신들의 뿌리로 여기고 있다. 이런 이유로 강경파 러시아인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같은 국가며, 우크라이나는 '소러시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과는 다르게 소련의 해체 이후 러시아는 체첸 사태 등 국내 정치의 불안정은 물론이고 모라토리움을 선언해야 했을 정도로 극심한 경제적 위기로 인해 주변을 신경 쓸 여력이 전무했다. 이로 인해서 동유럽에서의 막강했던 영향력을 순식간에 상실했다. 러시아 헤게모니의 붕괴는 러시아의 경제적, 군사적 수준을 대폭 하락시켰고, 이때 러시아와 그 국민들이 느낀 치욕감은 현재의 푸틴이 정권을 잡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푸틴 정권은 러시아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 경제를 회복시키는 한편 과거 소련 구성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예전 수준으로 회복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는 중앙아시아에서는 꽤 성과를 보았다. 이들 대부분의 국가가 복지 붕괴 등 소련 해체의 부작용을 러시아보다 강하게 앓고 있었고,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주 외화 수입원 중 하나가 러시아에 이주노동자로 나간 자국민들의 송금이기 때문이다. 석유 수출로 러시아 경제가 회복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 내에서는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졌다.
우크라이나도 심각한 인구감소를 맞이하고 있고, 러시아와 서방 양쪽 사이에 낀 지정학적 문제로 자국 경제가 좋지 않아 청년들의 인력 유출이 큰 나라이다. 특히, 동부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에게 러시아는 언어의 부담 없이 돈 벌러 갈 수 있는 나라로 인식되며, 그로 인해 경제적으로 봐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 어려운 환경이다.
서방 국가들에게 우크라이나는 단순히 러시아와의 경계에 있으면서 경제적으로도 큰 이점이 없는 동유럽 국가들 중 하나이겠지만, 러시아 입장에서 우크라이나는 동유럽 국가 중 몇 안 되는 비 NATO 국가이자, 흑해로 가는 항구가 있는 만큼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면서, 서유럽 세력과의 최전선이자 대규모 곡창 지대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