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아직도 줄을 서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는 방금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2014년 작, 루이뷔통 파운데이션 내부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입장까지 족히 2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자의 설명 때문이었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잠시 머물게 된 파리에서 사전 준비 없이 찾아간 건축물은 여전히 그 인기를 과시하고 있었다. 개관한 지 몇 년 지났으니까 괜찮겠지 싶었던 것은 안일한 생각이었다.
파리까지 또 언제 온단 말인가, 아쉬움에 속이 쓰렸다. 부슬비가 내리는 건축물 주변에는 앉아 쉴 공간도 마땅치 않아 보였다. 일단 대기하던 줄에서 빠져나왔다. 우산을 쓴 채 긴 줄과 시간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입장을 포기하자 시간은 갑자기 넉넉해졌다. 건물 주변을 천천히 걷는다. 크게 한 바퀴 도는 동안 건축의 조형 언어가 보인다.
캐나다 출신의 건축가 게리는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 미술관을 시작으로 게리의 조형 실험은 거침없이 진화했다. 이후 탄생한 건축물들은 자신의 건축 언어를 일관적으로 표출했다.
빌바오 이후 20년, 이 시점에서 건축가는 변신의 필요성을 느꼈던 걸까? 게리의 속마음은 알 수 없지만, 관객으로서 나는 내심 기대했었다. 아무리 독특한 조형언어라 할지라도 변화 없이 반복될 경우 금세 진부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진부함이야 말로 예술가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단어일 테니까. 결과적으로 겨울비 내리는 파리의 하늘 아래 우뚝 서 있는 루이뷔통 파운데이션을 통한 노장의 시도는 눈부셨다.
게리가 선택한 변신의 키워드는 “덜어냄”이었다. 대형 유리판을 휘어 만들어진 범선의 돛들이 바람을 가득 안고 서 있다. 출항 준비를 마친 듯 여유롭고 당당한 모습이다. 춤추듯 역동적인 형태와 함께 등장하던 파격적인 질감과 색감이 사라졌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색과 질감이라는 겉옷을 벗어버린 우윳빛 건축물이었다.
투명해진 건축물은 이제 주변을 담아내거나 반사시킨다. 비가 부슬거리는 파리의 흐린 하늘과 구름의 움직임, 주변 아클리마타시옹 공원(Jardin d' acclimatation)의 나무와 바람의 흔들림, 색색깔의 우산을 받쳐 들고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웅성거림까지. 이 모든 것을 담아낸 건축물이 이번에는 자신이 밟고 서 있는 물 위로 모습을 반사시킨다.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를 덜어내자 담아낼 새로운 것들이 줄을 잇는다. 다른 계절, 다른 시간, 다른 날씨에 온다면 이 건물은 전혀 새로운 얼굴로 나를 맞이할 것이다.
이곳을 처음 방문했던 2017년 2월 초에는 건축의 유리패널 일부에 다니엘 뷔렝의 작품 ‘빛의 관측소’가 설치돼 있었다. 빨강, 분홍, 초록, 파랑의 조각들이 게리의 건축물을 캔버스 삼아 펄럭였다. 건축물의 완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건물의 표피가 변화무쌍한 표현의 매개체임을 실험하고 있었다.
내부가 궁금했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공원 쪽 난간에 걸터앉아 블로그와 인터넷 기사에 올라와 있는 사진과 글을 오르내리며 궁금증을 달랜다. 건축물에 대한 배경을 서술한 기사가 풍성하다.
컴퓨터는 켜고 끌 줄 밖에 모른다는 건축가는 여행 중 비행기 안에서 이 미술관의 스케치를 했다. 그게 2001년. 그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처음 아이디어를 발의한 이후 13년간 첨단 기술과 협업 시스템이 가동됐다. 건물의 외피를 감싸고 있는 구부러진 유리판을 다룬 건축 공법은 꾸준한 실험의 혁신적 결과였다.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루이뷔통 재단의 CEO이며 LVMH 그룹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억만장자다. 그는 자신의 자본력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미술관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가시화했다. 부자는 별로 안 부러운데, 이런 식으로 자신의 부를 드러내는 부자는 부럽다. 과거 왕들의 사냥터였던 불로뉴 숲을 시민들의 문화적 휴식공간으로 만든 도시정책 과정에도 진통과 갈등이 있었다. 결국 파리에 또 하나의 랜드마크를 만들어 냈다.
2019년 봄 나는 루이뷔통 파운데이션 입장에 성공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하는 등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다. 나는 대기시간 없이 바로 입장했는데, 그날도 여전히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보인다. 인터넷이 모두에게 편리한 정보의 바다는 아닌가 보다.
화창한 봄기운에 둘러싸인 건축물은 축축했던 지난 모습과 다르다. 한껏 돛을 펴고 망망대해로 떠나려는 청년의 패기를 닮았다. 처음이지만 미술관의 내부는 오히려 익숙했다. 뻥 뚫린 중정의 빈 공간에서 게리 특유의 비정형적 공간이 들쑥날쑥 하다.
내가 가장 오래 머물었던 공간은 옥상 야외 테라스다. 앉고 누울 수 있는 장소가 풍성하다. 파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도 좋다. 마침 파리의 하늘이 높고 푸르다. 요트를 타고 항해 해 본 적은 없지만 비슷한 착각을 만끽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요트 항해의 경험자에 의하면 하늘, 바다가 하나가 된 공간에 찍힌 점처럼 자신과 요트의 존재가 느껴진다고 하던데, 그 경이로움의 100분의 1 쯤은 느낄 수 있다. 위치를 바꿔가며 앉는다. 유선형 입면의 일부가 시아에 걸리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깜박 잠이 들 것 같은 시간이다.
개인적으로 게리의 건축조형은 편하지 않다.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지만 시간을 두고 그리워하게 되지 않는다. 내 정서와는 잘 맞지 않는 건축물이라고 해 두자. 하지만 이 건축이 표방한 외피에서의 “덜어냄”은 사색을 불렀다. 색채는 우윳빛으로 투명해졌고, 여전히 유기적이지만 바람을 품은 돛처럼 팽팽해졌다. 그 덕분에 독특한 조형언어로 유명한 이 건축가의 건물에 조화의 공간이 생겼다. 설치미술가의 작품,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흘러가는 구름과 새와 하늘의 모습을 담아낸다.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비로소 완성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한다는 것이 우주의 진리라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됐다는 듯이.
어떻게 나이 먹어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많은 요즘이다. ‘덜어냄’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고 또 절감한다. 체력은 떨어지는데 몸의 외피는 돌덩이처럼 완고해지니 무어가를 내려놓는다는 게 물리적으로 힘들다. 덜어내야 빈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이 있어야 숨을 쉬고 새로운 무언가와 소통할 수 있을 텐데. 80이 넘은 노 건축가의 프로젝트를 보며 길어진 생각이다.
*2017년 3월 24일 충주 교차로 칼럼세상 <노장은 건재했다>를 바탕으로 다신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