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내다

by 김나영


오랜만에 네이버 마이박스(나는 아직까지도 엔드라이브라고 부르는)를 들어갔다. 사진, 동영상 백업용으로 중학생 때부터 열심히 올려온 것에 비해 자주 들여다보지 않는 공간이다. 어린 시절 나는 친구들의 사진도 모두 백업해 두었으며, 길 가다 찍은 흔들린 사진을 포함하여 온갖 이상한 사진도 모두 올려뒀다. 비슷하게 나온 사진들도 모두 저장했다. 지울 수가 없었다. 당연히 절대로 꺼내보지 않았으며, 그저 내 드라이브의 저장공간만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씩 들어갈 때마다 이제는 내게 의미 없어진 사진들을 이따금씩 지워버리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지우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지워버려야 할 사진들이 산더미다.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 사진은 뭔가 지워선 안될 절대적인 기억의 조각 같은 것이었고 손가락 하나로 삭제버튼을 누르는 것이 참 무겁게만 느껴졌다. 사진을 지우면 그 순간도, 그 감정도 모두 사라질 것만 같았다.


블로그를 시작하고서부터 사진에 대한 강박이 사라졌다. 여전히 쓸데없는 사진들은 많이 찍었지만 블로그에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왕창 올리고나면 엔드라이브엔 올라가지 않은 채 내 앨범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삭제됐다. 가끔씩 찾고 싶은 어떤 사진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지만 아쉬움이나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제하지 못한 채 여전히 내 엔드라이브에 남아있는 기억들이 있다.



이제는 없어져서 못 가는 학창 시절 단골 분식집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져 버린 친구들의 얼굴과, 다퉈 멀어져 다시는 볼 수 없는 친구들의 얼굴들이 남아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열정 넘치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있고, 엄마와 다퉈 우여곡절 끝에 얻어낸 속초여행 사진들이 떠다닌다. 한때 키웠던 앵무새 똥배의 사진이 있고, 이제는 볼 수 없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진이 있다. 보기만 해도 당시의 하루가 떠오르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어떤 순간인지 기억나지 않는 사진들이 있다. 내가 정말 좋아하던, 하지만 이제는 없는 빨간색 남방이 있다. 도저히 이해 못 할 필터와 스티커를 잔뜩 얹은 사진들이 있다. 촌스러워 미칠 것만 같은 그 시절의 내 스타일링과 내 포즈와 내 표정들이 남아있다. 단발머리의 내가 있고, 파마를 하지 않은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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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손에 봉숭아물을 들여주는 내가 있고, 할머니의 손에 봉숭아물을 들여주는 엄마가 있다. 팔아버려서 이제는 없는 내 첫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이 있다. 폴더이름은 바꿔놓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고 일부러 못 본 척했던 사진들이 있다. 야자가 일상이던 고등학생의 내가 있고, 이제는 못 끼는 서클렌즈를 낀 내가 있다. 내가 과거에 좋아하던 연예인들의 사진이 있고 유치원 때의 내가 있다. 사소한 것도 사진을 찍어서 기록했던 과거의 나는 사라진 채 어느새 셔터를 누르는 일이 점점 버거워진 나만 남아 있었다.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26살의 나는 어리숙하지만 자신감 넘쳤던 과거의 나보다 덜어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사소한 순간들을 쉽게 잊어버리는 현재가 조금은 아쉽게 느껴진다. 쓸모없는 것들을 찍고 기록하며 순간순간을 기억하려고 기록해 둔 것들을 다시 들여보지도, 블로그에 올리지도, 엔드라이브에 올리지도 않은 채 종종 삭제해버리고 만다. 삭제하기가 쉬워져도 너무 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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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핸드폰의 앨범은 항상 1,000장을 넘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삭제하고 엔드라이브에 폴더별로 정리해 잔뜩 올렸다. 블로그에 일상을 쓰고 나선 미련 없이 지웠다. 이러던 와중에도 '여행사진'은 내게 절대로 지울 수 없는 무언가였는데 그마저도 깨져버렸다. 여행사진도 블로그에 잔뜩 올리고 나면 잘 나온 내 사진이 아니고서야 굳이 엔드라이브에서 찾아보지 않는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아버렸다. 19년도에 다녀왔던 내 첫 유럽여행 사진은 거의 남아있질 않다. 의도적인 건 아니었다. 카메라로 찍은 몇몇 사진과 업체에서 찍어준 스카이다이빙 사진을 제외하곤 원본이 나에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블로그에 여행기를 열심히 작성하고 엔드라이브에 올렸다고 착각한 채 앨범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당시엔 이런 중요한 사진들을 다 삭제하다니, 이렇게 멍청한 내가 있을 수가 있다니. 하며 같이 간 친구에게 사진을 보내달라고 징징거렸다. 일 년이 넘은 지금 친구는 여전히 보내주지 않았지만 나도 굳이 찾지 않았다. 사진은 그 순간을 기억하게 해주는 약간의 도움일 뿐 그 시절의 내가 온통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진삭제와 함께 사라지는 순간들도 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폴더명은 바꿔둔 채 몇 년간 들여다보지 않은 사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무슨 이유에선지 삭제하기가 어려웠다. 절대적으로 좋은 기억도 아니라 스쳐가는 순간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웃긴 건 그 폴더를 못 본 척했다는 것이다. 들어가면 안 될 것처럼 굴었고 모르는 척을 했던 그 폴더를 다시 열었다. 무려 세 개의 폴더를. 몇백 장이 넘는 순간에서 남기고 싶은 사진 10여 개정도만 옮긴 후 모두 삭제해 버렸다. 휴지통까지 비워버렸다. 다시는 회상할 수 없는 순간들을 이제야 보냈다.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다. 진작 삭제해 버릴걸 그랬다. 그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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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미화된다. 지금의 내 순간도 분명히 미화될 것이다. 울고 있는 사진을 남겨두진 않는다. 다쳐서 아픈 순간들을 찍어 기록하지 않는다. 즐거운 순간, 맛있는 걸 먹는 순간과 같은 기억하고 싶은 순간만 사진을 찍어 기록한다. 그러니 사진을 보며 떠오르는 기억은 미화되는 것이 당연하다. 학창 시절 나와 너무 오랜 시간 함께 붙어 다니던 친구들의 사진들을 삭제한다. 그냥 이제는 쓸모없어져 버린 그 친구들의 순간들을 삭제한다. 어디선가 잘들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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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글을 쓰는 이유는 어쩌면, 다시는 못 볼 사진들을 삭제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 지워낸 사진들에 일말의 아쉬움도 어떤 긍부정적인 감정도 없었다. 그냥 이제는 쓸모없져 버린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것은 그때의 기억은 잊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진을 지운다고 해서 그 기억이 전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엔드라이브에 들어갈 때마다 떠올랐던 기억들이 이제는 엔드라이브에 들어가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쓸모없어서 버린 선인장 모양 조명을 가끔 기억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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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버리고 싶은 폴더 하나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렇지만 난 그 폴더를 평생 지우지 못할 것을 안다. 내가 정말 최고로 행복했던 그때, 몇 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하루가, 그때의 바다 냄새와 후덥지근한 바람, 뜨거운 모래와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려 하지만, 과거를 잘 회상하지 않지만 절대로 잊지 않고 싶은 순간들을 담은 그 폴더를 어떠한 이유에선지 들여다보고 싶진 않지만 절대로 지우지 못할 것을 나는 안다. 운이 좋게 그 순간을 덮을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땐 비워낼 용기가 생길까?


태국여행, 부산여행부터 온갖 약속으로 찍어재낀 나의 사진들로 엉망인 내 앨범을 언제쯤 정리할 수 있을까. 누군가 대신 사진을 대신 정리해 줬으면 좋겠다. 이제는 필요 없는 엔드라이브에 남아있는 사진들을 언제쯤 정리할 수 있을까. 사진뿐만 아니라 언제쯤 필요 없는 것들을 다 비워낼 수 있을까. 야무지게 인생계획 세워놓고 다시금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에 대해 고민해 보는 순간이 오면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가끔은 너무 한 게 없이 살아온 게 아닌가 싶은 후회가 가끔 들지만, 나름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내렸던 그때의 순간들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때 내가 내린 결정은 당시에 최선인 결정이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후회할 필요가 없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비워내고 내가 정말 좋아하고 원하고 사랑하는 것들로 꽉 찬 하루하루를 살자. 힘들겠지만 그렇게 꼭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자. 순간을 찍되 지워낼 건 지워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지며 살자. 미련은 덜 어내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