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영어로 하면 'philosophy'이다. philo의 어원은 philia로 사랑을 뜻한다. sophy의 어원은 sophia로 지혜를 의미한다. 그래서 철학을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한다. 지혜를 동반자로서 지속적으로 알아가고 확대하는 것이 철학이 가지는 의미이다. 철학과 수업을 들으면 시작 전 가정 먼저 꺼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꼭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모두가 정해놓은 정석대로만 얘기하면 재미없으니 반대로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지혜와 사랑의 위치를 바꿔서 사랑에 대한 지혜는 어떨까. 철학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학문이라면, 사랑에 대한 지혜 또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 효율, 성장이 우선되는 현시대에서 사랑의 가치는 퇴색되어 가지만, 사실 사랑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가치이다. 삶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랑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육아를 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생각보다 정말 많은 부모의 노력이 요구된다. 부모는 돈, 시간, 여가 등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아기를 돌본다. 사람은 어느 정도 머리가 크면 스스로 알아서 잘 자랐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스스로 알아서란 말은 어폐가 있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스스로란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희생이 동반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많은 희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역시 사랑이다. 사랑은 무형적인 가치이므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사랑이라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당장의 이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많은 희생을 쏟는 경우는 대다수 사랑인 경우가 많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젊은 남녀의 절절한 로맨스만 사랑이 아니다.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내 삶의 일정 부분을 포기하는 것도 사랑이다.
내가 결혼할 당시 한 상사에게 결혼 소식을 전했는데 내 손을 붙잡고 한참 간 서서 해줬던 말이 있다. 본인이 생각할 때 어른이 되는 3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결혼을 하는 것이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시작이다. 배우자와 함께 살면서 부딪히는 일들이나 둘 사이를 넘어 가족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함께 겪어가는 것, 그 모두가 사랑이다. 더 이상 연애 때처럼 심장은 뛰지 않더라도 언젠가부터 내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한, 아니 있어야만 할 것 같은 일상이 바로 사랑이 무르익는 과정이다.
두 번째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아이는 갖기 전부터 부모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아이를 하늘이 내려준다는 말이 있다. 생각보다 많은 부부들이 아이를 갖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이다. 노력에 노력을 더해 어렵게 아이를 가져도 열 달 동안 안전하게 품고 있어야 한다. 어디가 아파도 쉽게 약을 먹을 수 없다. 약을 잘못 먹었다가는 뱃속 아이에게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아도 고생은 끝나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아이 덕분에 부모의 눈 밑은 까맣게 변해간다. 그 이후로도 끝나지 않은 일련의 과정은 역시 사랑 없이 불가능하다. 사랑만이 이 모든 희생을 감당하게 한다.
세 번째는 부모의 죽음이다. 인간의 특성 중 하나는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더 갈망한다.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결핍된 것을 채우려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부모의 존재 또한 태어날 때부터 함께 했으니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지금의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장례식장을 많이 가면서 생각보다 시간이 짧다는 것을 느낀다. 장례식장에서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영정사진은 항상 웃고 있고, 그 외 모든 사람들은 울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의 울음을 웃음으로 응대하는 것은 사랑받았던 자의 특권이다. 부모가 사라졌을 때 역설적으로 부모를 더 많이 생각한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더 갈망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랑을 진정 깨닫는 것을 바로 그 순간이다.
처음에 얘기했던 철학과 연결시키면, 철학은 사람을 더 성숙하게 만드는 학문이다. 성숙하면 필연적으로 어린이에서 어른이 된다. 그리고 어른이 되려면 위에서 말한 3가지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저 3가지를 경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