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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도쿠 Mar 24. 2019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중학생 때 나는 제법 당돌한 아이였다. 하고 싶은 말은 숨기지 않고 쏟아내는 편이었다. 대상이 선생님이라도 말이다. 다행히 학생의 본분에 충실하여 공부는 조금 하는 편이서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내게 했던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이 뭐였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답변은 똑똑히 기억한다.


"그냥요."


그 답변을 들은 선생님은 세상에 그냥이란 이유는 없다고 했다. 그 어떤 일이든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당돌했던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수긍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 때는 철이 없었다.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쏟아냈다.


"세상에 그냥이란 이유가 없다면 삶이 너무 팍팍할 거예요. 가끔은 이유가 없어도 괜찮을 때가 있죠."


내 얘기를 들은 선생님은 미소를 지었고 특별히 나를 꾸짖지는 않았다. 나는 그 이후로도 당시의 답변을 떠올리며 스스로 생각해도 역시나 멋진 대답을 했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살다보면 이유가 없을 수도 있지.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가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런 것을 고민하면 머리만 아플 뿐더러 지금의 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니 단단한 그 생각도 점차 마모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꼭 눈에 보이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다보니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누군가 따로 숨기지 않았지만 쉽게 발견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당연하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이미 나의 주관이기 때문이다. 주관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만의 견해나 관점'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남에게는 하찮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함과 하찮음을 구분하려면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내게 카메라가 있다. 내게는 중요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떤 이는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게 카메라가 중요한 이유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는 것은 대체로 논리적이다. 가끔 비약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대게 일어나는 결과에는 그럴 법한 이유가 있다. 여기서 그럴 법하다는 것은 타인의 관점이 아닌 전적으로 결과를 일으킨 주체의 관점이다. 즉, 그 사람의 주관인 것이다.


가끔 이유 없이 짜증내는 사람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유가 없을까. 날씨가 좋지 않다거나, 동료와 싸웠다거나, 더 나아가서 호르몬 분비로 인한 생체 리듬의 불균형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정확한 이유를 모를 뿐이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대체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없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제약이 발생하고 이미 한계가 정해진 상황에서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우리는 이유를 알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생물학자들이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도파민이 분비되었을 때 뇌를 MRI 영상으로 찍어보면 강박 장애가 있는 사람과 유사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강박장애가 있는 사람이 어떤 행동이나 습관, 물건에 대한 집착을 보이듯이 상대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상대방의 사소한 말투나 행동에도 쉽게 서운함이나 아쉬움을 표현하고 그 때문에 갈등이 발생하며 심지어 이별까지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보통 사랑하지만 헤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이럴 때 발생하는 것이다.


사랑을 단순히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랑이 담고 있는 가치를 많이 깎아내는 것 같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가장 숭고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을 비하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상대방을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할 때를 경계하기 위해 꺼낸 말이다. 이유 없이 좋아하는 게 사랑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몇 번의 연애를 해보니 이유 없이 좋아하게 되면 이유 없이 헤어지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철저히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서 모든 이의 상황에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오랜 연애를 하다보면 더 이상 이성적으로 끌리는 것이 아닌 편안함으로 만날 때가 있다. 그 편안함이 주는 장점도 많지만, 그 편안함으로 인해 권태기가 찾아오고 헤어지기도 한다. 진짜 사랑은 그 때부터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호르몬의 영향이 아닌 진짜 내가 상대방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려면 이유가 필요하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 이유를 알고 있다면 사랑은 오래 갈 것이고, 그 이유가 없다면 알아내야 한다. 사랑할 이유가 없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외모와 몸매 같은 외적인 부분이 될 수도 있고, 자상함이나 배려 같은 내적인 부분이 될 수도 있다. 혹은 함께 있으면 행복감, 즐거움 등 좋은 기분이 드는 순수한 나의 감정일 수도 있다. 나는 누군가를 그냥 좋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좋아하는 것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인한 내 감정에 스스로 빠진 것이다. 나는 상대가 아닌 내 감정을 사랑하는 것이다. 타인을 사랑할 때 이유를 발견해보자.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면 헤어지는 게 옳고 이유가 있다면 그 사랑을 유지하자. 남녀를 떠나 대상이 누가 됐든 혹은 사랑이 아니라 그 무엇이 됐든, 세상 모든 만물에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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