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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도쿠 Feb 21. 2020

침묵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해


대학교 신입생 때 일이었다. 당시 나는 갓 입학한 09학번이었고, 낯선 대학생활에 적응하던 시기였다. 처음부터 몇 가지 난관에 봉착했었는데 수강신청과 동아리 선택, 그리고 고학번 선배들과의 만남이었다. 그중 특히 어려웠던 것은 고학번의 선배들을 대하는 일이었다. 취업을 앞둔 4학년의 선배들은 우리 또래들보다 훨씬 성숙해 보였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해방된 마음으로 대학생활을 즐겼다. 설레는 미팅과 신나는 술 약속이 언제나 일상이었다. 그러나 4학년 선배들의 일상은 달랐다. 그들은 토익과 자격증을 공부하고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녔다. 일상에서 괴리가 발생하니 마주칠 때마다 가시방석이었다. 불안함보다는 어색함이었다. 새로운 인간관계에 서툴던 스무 살 시절, 고학번 선배를 만났을 때 특별히 할 얘기가 없는 것이 참 고역이었다.


중간고사를 앞둔 어느 날, 학습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데 고학번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는 까마득히 높아 보이는 03학번이었다. 몇 번 얘기도 나눠본 적이 없는 초 어색한 선배였다. 잠깐 인사를 나누고 집에 가려는 찰나, 선배가 별 약속 없으면 치맥 한 잔 하자고 권했다. 거절한 명분이 마땅치 않아 선배를 따라갔다. 그곳은 당시 유행하던 프라이팬 치킨집이었다.


치킨과 맥주가 나오고 우리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만이 감돌았다. 어색함을 참지 못한 나는 선배에게 이것저것 물어봤고 선배는 친절히 답해줬다. 선배가 무어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질문을 하는 내 머릿속에는 이미 다음 질문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함께 있는 시간 동안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했다. 자연스럽지 않아서일까. 굉장히 어색해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티나게 들켜버렸다. 선배가 웃으면서 꼭 그렇게 대화를 이끌지 않아도 된다면서 나를 만류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침묵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해."


그 한 마디는 내 강박을 일시에 소거한 명대사였다.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흐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화든 어떤 수단이든 활용하여 시간의 공백 없이 항상 무언가로 채워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비어 있어도 되는 거구나. 꼭 채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당시 그 이야기를 했던 선배의 나이는 26살. 이제는 내가 그 선배의 나이를 훨씬 넘었지만 그 말은 아직도 내 삶을 지배한다.


평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아직도 그런 어색함을 못 견디는 사람들이 꼭 있다. 어색함은 사람을 뻣뻣하게 만드는 힘이 있나 보다. 꼭 어떻게든 티가 난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항상 이렇게 얘기한다.


"어색한 건 당연한 거잖아요. 침묵을 즐겨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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