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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도쿠 Mar 21. 2019

그 한 마디가 나의 세계를 바꾸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을 수 있다.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집에 오는 방향이 같아 선배 2명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있는 상황이었다. 선배 2명은 내가 평소 형과 누나라고 부르는 이들이었고, 후배를 살갑게 대해줘 내가 잘 따르던 사람이었다. 개봉역쯤에 이르렀을까. 형이 툭 내뱉었다.


"ㅇㅇ이가 군대 가서 휴가 나오면 만나줄 사람 누가 있지? 너네 학번에 여자애들도 많이 없고, 동기들도 다 군대에 가 있을텐데."


나와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은 다 남자였다. 남고 출신에 대학까지 왔는데 어떻게 또 남자들과 친해져서 함께 패밀리를 이루며 열심히 대학생활을 하던 참이었다. 생각을 해보니 군대에서 휴가 나와도 딱히 만나줄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군대 가지 않은 친구들이야 있었지만 대부분 친구들은 1년 후 나와 비슷한 시기에 군대에 가기로 마음을 잡은 상태였다. 나는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때 옆에 있던 누나가 얘기했다.


"ㅇㅇ이는 내가 만나주면 되지? 휴가 나올 때 언제든 연락해."


큰 의미를 담은 말은 아니었다. 그냥 상황을 맞춰주고자 내뱉은 말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맘은 왜 이렇게 일렁였을까. 정말 무심코 던진 그 한 마디가 내 마음 속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 때부터였다. 그것이  대학교 1학년 때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던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사랑의 시작은 생각보다 별 것 없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극적인 순간에 상대방에게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극적인 순간은 잘 일어나지 않을 뿐더러 사랑의 시작은 대부분 사소했다. 그러나 사랑의 독특한 속성은 사소한 이유로 좋아하게 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이유는 결코 사소하지 않게 된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하루종일 머릿속에 그 사람만 가득하게 되는 일. 그것은 세계를 바꾼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주인이 상대방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 날부터 나는 아침 정각 7시에 일어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 전에 그 시각에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이불 속을 뒤척이며 일어났기 때문에 7시에 알람을 맞추어 놓더라도 정작 일어나는 시각은 항상 10~15분씩 늦었다. 그러나 누나가 그렇게 함부로 돌을 던진 이후부터 빨리 학교를 가고 싶은 마음에, 정확히 말하면 오늘도 그 누나를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두근대는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던 것 같다. 나보다 한 학년 선배였고, 같은 수업으로 겹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학교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20살 당시, 사랑은 낭만적인 것이라고 믿었고, 진실된 마음이 있다면 우연이란 이름이 서로의 만남을 이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글오글한 얘기지만, 그 때는 정말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 캠퍼스를 돌아다니다 보면 신기하게도 꽤 마주쳤다. 그 날 하루의 기분은 마주침의 여부로 결정되었다. 한 번이라도 마주친다면 그 날의 기분을 하늘을 찌를 듯했고,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면 실망감과 아쉬움을 지니고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들과 노래방 가면, 항상 부르는 노래는 팀의 '사랑합니다'였다. 아주 절절한 짝사랑의 대명사 노래이지 않은가. 학교생활을 같이 친구들도 내가 그 누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사실 그 누나는 나름 인기가 많은 누나였다. 우리는 같은 동아리여서 알게 된 사이인데, 그 동아리에 그 누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당시 7명 정도 되었다. 엄청나게 미인은 아니지만, 항상 상냥했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조용한 이미지였다. 청순한 느낌이 당시 순수한 20대 초반 대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좋아하는 마음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좋아하는 시간은 모두 매몰비용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순수해서 절로 미소가 나는 추억이지만, 당시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시간을 쓰레기통에 그대로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내 마음을 고백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누나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연락을 줄곧 하는 누나 동생 사이로 잘 지내고 있다. 얼마 전, 그 누나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식을 올렸고, 나는 누구보다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저 사람을 좋아했을까'란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내겐 전혀 매력적이지 않으며, 내가 좋아하는 이상형과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사람을 좋아했던 것은 내가 아니다. 20살의 나였다. 마찬가지로, 20살의 내가 좋아하는 것은 얼마 전 결혼식을 올린 누나가 아닌 21살 한 살 연상의 누나였다. 사랑에는 분명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좋아했을 뿐이다. 순간이 영원으로 바뀐다면 낭만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생각보다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이 참 신기한 것은 그렇게도 못잊을 사랑 같으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또 의외로 담담하다. 그리고 봄날을 가장한 더 큰 설렘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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