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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도쿠 Feb 17. 2020

먹고 싶은 점심 메뉴를 선택할 권리

요새 90년대생은 핫하다. 밀레니얼 세대의 대표 격으로 칭하면서 여기저기 90년생을 배우기 위한 노력들이 엿보인다. 우리 회사에서도 관리자급 대상으로 90년대생을 공부하는 워크숍을 벌인 적이 있다. 그만큼 90년대생이 미치는 영향력이 사회에서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90년대생이라고 콕 집으면서 특별 취급하는 이유가 뭘까.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소신과 주관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성향이 높다. 그러나 나는 90년대생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손해보지 않는 선에서 웬만하면 조직에 맞추고 양보하는 편이다. 그래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아주 소신껏 말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점심 메뉴이다.


지금은 수평적인 분위기를 위해 회사 내에서의 직급을 모두 '프로'라는 이름으로 통일했다. 그러나 겉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직급은 여전히 존재한다. 한 때 부장, 차장, 과장 등으로 불렸던 분들과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총 다섯 분의 상사들과 함께 하는 식사였다. 내 입장에서는 어렵고 불편한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집을 방문했는데 부장님이 짬뽕을 선택하자 상사들이 연이어 모두 짬뽕을 선택했다. 진짜 짬뽕이 먹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당시 나는 볶음밥을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하고 분명했다. 볶음밥이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기류가 미묘하게 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ㅇㅇ는 먹고 싶은 것 먹어."


숨 쉬고 싶으면 숨 쉬어 같은 당연한 말을 들었다. 너무나 당연해서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것을 다시금 생각했다. 볶음밥을 먹고 싶어서 선택한 것인데 그것을 되짚어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속내는 그들처럼 메뉴를 같은 것으로 통일하기를 원한 것은 아닐까. 메뉴를 통일해서 빠르게 먹고 사무실로 복귀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점심시간은 누구에게도 터치받지 않는 엄연히 나만의 시간 아닌가. 회사 내 정책으로 살펴봐도 점심시간은 근무시간으로 인정 받지 못한다. 그러니 엄연히 자율성을 보장받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시간마저도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사회생활은 결국 조직생활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입장으로서 대부분의 결정은 조직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수십 년 버텨온 조직이 나 하나로 인하여 크게 변할 리도 없을뿐더러 그게 상대적으로 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점심 메뉴 선택권이다. 세상 살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는데 적어도 먹는 것만이라도 내 마음대로 선택하면 안 될까. 그래서 아직까지도 나는 상사들과 같은 메뉴로 통일하지 않는다. 언제나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소신껏 선택한다. 무엇이 먹고 싶냐는 질문에 '다 괜찮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항상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정확히 전달한다.


회사 생활은 고단하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기 때문에 결코 쉬울 수가 없다. 뿐만이 아니다. 돈을 모으는 것도, 빚을 갚아나가는 것도,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쉬운 것 없다. 삶에는 수많은 선택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선택들을 자율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강요받은 채 살아왔다. 그 와중에 점심 메뉴까지 강요받는 것은 참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것만큼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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