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도쿠 Sep 04. 2020

닭의 별에서 도망친 인간

평소 일주일에 치킨을 3번 이상은 먹는다. 보통 퇴근하고 저녁에 시켜먹는 편이다. 회사생활이 유달리 힘이 드는 날이면 그 날은 치킨 먹는 날이다. 오늘 치킨 먹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면 점심부터 이미 기분이 좋아진다. 업무도 더 잘 되는 것 같고 왠지 모를 힘이 난다. 이렇게나 치킨을 좋아하고 많이 먹는데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치킨 덕후는 못 되는 것이다.


요새 보면 한 가지를 열심히 파고드는 덕후가 많다. 정말 좋아하는 것을 깊이 파고들면서 영역을 넓혀간다. 그들의 해박한 지식을 보면 굉장히 놀랄 때가 많다. 나는 치킨을 정말 좋아하지만 덕후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내가 먹는 치킨의 종류는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치킨은 웬만하면 다 좋아하지만, 다양한 종류로 먹는 편은 아니다. 음식이 쉽게 질리는 편이 아니므로 보통 한 가지에 꽂히면 계속 그것만 먹는다. 내가 주로 먹는 치킨은 멕시카나와 BHC이다. 그중에서 멕시카나는 양념, BHC는 뿌링클만 먹는다. 10번 중 7번은 두 종류에서 시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를 깊게 파는데 너무 좁은 곳을 깊게 파는 느낌이다. 두 종류의 치킨으로 할 얘기는 그다지 없어서 유튜브 방송은 진작에 포기했다.


원래 최애 치킨은 멕시카나에 있던 부매랑 치킨이었다. 참고로 부매랑은 부어먹는 매콤한 소스랑의 줄임말이다. 당시 아이유가 광고모델이었는데 표지가 너무 예쁜 나머지 홀린 듯 멕시카나 치킨에 전화를 걸었다. 그때 처음 주문한 치킨이 바로 부매랑 치킨이었고 한눈에, 아니 한맛에 반해버렸다. 슬프게도 부매랑 치킨은 어느 순간 단종되었고 치킨집 사장님은 내게 그 사실을 직접 구두로 알려주었다. 영원한 이별이었다. 첫사랑은 아니지만 가장 사랑했던 치킨으로 아직까지 내 마음에, 아니 내 혀에 남아 있다.  


어렸을 적부터 치킨을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고 항상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있다. 엄마는 간호사인데 당시 나를 낳기 몇 시간 전에도 계속 병원에서 근무 중이었다고 한다. 그 날따라 양념치킨이 유독 먹고 싶은 날이었다. 하지만 많은 환자로 인해 업무가 바빠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업무를 지속하는데 갑작스레 진통이 시작됐고 얼마 뒤 내가 나왔다. 그러므로 엄마의 말씀은 이렇다. 그날 치킨을 먹지 못한 한이 너에게 이어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태몽(?)은 항상 양념치킨이라고 하신다.


학창 시절부터 치킨을 좋아하는 내게 친구들은 '치킨 슬레이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친구들도 치킨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치킨은 국민 음식답게 내 친구들도 모두 치킨을 좋아했다. 우리는 치킨팸을 만들어 여기저기 치킨집 탐방을 다니기도 했다. 특히, 고등학교 때 한 친구와는 부어치킨을 일주일에 3번씩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6,900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이어서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우리에게는 딱 맞는 치킨집이었다. 둘이서 최대 4마리까지 먹은 기억이 있다. 마음뿐만 아니라 식성도 맞는 그 친구와는 눈빛만 교환해도 상대의 치킨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치킨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꼭 따라다니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널리 통용되는 관용적 표현이다. 전생에 닭이랑 원수 졌냐는 얘기는 정말 수십 번 들어보았다. 아마 닭에게 심하게 괴롭힘 당하거나 혼쭐이 난 뒤, 인간으로 태어나 닭에게 복수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듣다 보면 가끔 상상도 해본다. 닭과 원수를 진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닭의 부리를 피해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 것인가. 어쩌면 닭의 별이 따로 있고 나는 거기서 도망친 인간이 아닐까. 지구로 오면서 머리를 부딪혀서 기억은 못하지만 말이다.


오늘도 그렇게 치킨을 먹었다. 지금까지 미루어 보았을 때 누적 2,000 마리 정도는 먹은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있는 그대로'란 말이 좋게만 보이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