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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민환 Feb 10. 2016

<드라마와 현실사이에서 바라는 것>

청춘에게 희망이 들리기를 바라며...

평소에 드라마에 큰 관심이 없다. 응답하라 시리즈도 하나도 안 봤다. 

드라마 이야기가 나오면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그런 자리에서 나는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다. 

드라마에 관심도 없는 나는 최근 한 드라마는 꼭 챙겨본다. 

해야할 일을 덜 해도 마무리하고 TV 앞으로 뛰어간다. 21시 50분에 리모콘 사수 후, S 방송사를 튼다. 

<육룡이 나르샤> 때문에 월요일, 화요일이 기대된다. 

참, 드라마가 나의 월요병을 이기게 해준다. 고마운 방송이다.


몇 주전, 드디어 시청자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면이 등장했다. 

대한민국 수험생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1:1 대결. 

미국에 힙합이 있고 2pac과 B.I.G가 있다면, 한반도에는 ‘이방원과 정몽주’가 있다. 

바로 <하여가>와 <단심가>가 으스스한 선죽교 위에서 울려 퍼졌다. 

이방원이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 백년 함께 누려보세”로 운을 띄우지만 정몽주는 귀를 막았다. 

“내가 죽고 백번 죽어도 ... 님을 향한 일편단심은 변하지 않는다”

선죽교 위에 심사위원은 단 한명이었고 그는 무자비한 심사위원이었다. 

심사위원은 패하지 않았는데 상대를 패버렸다. 결국은 죽고 말았다. 

힙합 역사보다 더욱 무서운 한반도 배틀 역사이며 결과이다.


드라마가 끝난 후,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조국을 지키고자 한 정몽주,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자한 이방원.

이 둘의 모습에서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한국을 떠나 새로운 꿈과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와 한국 내에서 살아가며 맞서 싸우는 젊은이의 모습을 말이다. “전자가 나쁘다, 후자가 나쁘다”를 따지는 건 아니다. 

기존 환경을 바꾸고자 하는 ‘이방원’적인 사람과 지키며 변화시키고자하는 ‘정몽주’적인 사람이 

이 시대 청춘들에게 남 일은 아니다. 지인을 통해 들을 수도, 학교 동기일 수도, 내 친척일 수도, 내 형제일 수도 있다. 이런 부류가 우리 가까이 존재하고 있다.


존재하긴 하지.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현실이 안타까우면서 나의 일 수도 있으니 심장이 더욱 멎어진다. 

과거에도 해외로 떠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과 비교하면 상황과 의미가 대조적이다. 

한국 사회에 치이고 지쳐서 엮겨워서 떠나는 것이다. 

또한 여러 비슷한 상황들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민자 증가, 한국 국적 포기자 증가, 해외기업 취업 증가, 인재 유출 증가’ 등으로 

일명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식으로 조국에 대해 절망적인 태도를 가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정몽주’파도 존재는 하나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 

긍정적으로 살아도 희망적으로 살아도 무참히 밟히고 밟혀 작아지고 피하게 된다. 

가해자는 ‘니가 밟힌 게 잘못. 나는 잘못은 없다.’라며 ‘정몽주’적인 자들을 비아냥거린다. 

죽지 못한 ‘정몽주’들은 숲으로 피한다.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슬프다. 나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할 상황이 올테니깐.


이방원과 정몽주는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연기자 유아인 씨와 김의성 씨는 드라마 속에 존재한다. 

역사를 담은 드라마라 해도 드라마이고 픽션이다. 혼자 과대해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며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 ㅡ이성계와 정도전은 정몽주과 함께 하지 못하였고,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이지만ㅡ 이성계와 정도전, 정몽주, 이방원 서로가 의지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갔을 때처럼, 

이 시대에도 우리와 함께,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이성계와 정도전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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