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에서 1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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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기로운 민정

짐을 들고 전철을 탔다. 키가 작아서 짐을 올려놓는 선반은 어림도 없다. 그렇다고 바닥에 놓기도 그랬다. 좌석이 없어서 서서 가야 했다. 좌석에 앉아 계신 어르신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들고 있던 짐을 받아 주신다고 짐 가방을 당신 무릎 위에 올려놓으셨다. 얼떨결에 사양할 타이밍을 놓쳤다. 눈빛으로 속삭이듯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맡겼다. 아니 맡겨졌다.

시골에서 학교 다닐 때 버스를 타면 자리에 앉은 사람이 서 있는 짐을 들어주는 것은 당연했다. 아니, 어쩌면 좌석에 앉은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시골에는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았기에, 버스는 늘 만 원이었다. 특히 장날에는 더 복잡했다. 등하교 때는 자리 잡은 교우들끼리, 서로가 몰라도 그냥 들어주고 맡기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어른들도 그랬다. 학생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면 어른들은 고맙다는 표현으로 무거운 책가방을 들어주셨다. 책가방은 얼마나 무거웠던지, 책가방만 맡겨도 홀가분했다. 굳이 앉지 않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1~2시간쯤 서서 가는 것은 문제없었다.

버스를 타면 가방을 들어주고 맡기는 일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잊혀갔던 일을 상기시켜 주셨다. 어르신 덕분에 불편하고 당황해했던 나의 첫 마음이 부끄럽고 죄송했다. 추억을 소환하며 겸연게 웃다가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아무나 믿지 못하는 마음에,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했겠지만, 친절을 받는데도 용기가 필요한 세상에 내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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