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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기로운 민정 Jan 23. 2024

우체통이  100-72

#책과강연#백백글쓰기#14기#우체통#편지

눈이 바람에 나리는 날이다.  어제 내려 쌓인 눈 바람이 몰고  오는 건지,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지 알 수 없다. 바람이 코끝을 깨무는 것 같은 추위 때문에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다. 피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체통이 시야에 들어온다. 빨간 우체통이 반갑다. 오래전에 헤어진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달려가서 인사라도 나누고 싶은 충동이 일렁인다. 눈치 없는 버스가 바로 오는 바람에 우체통과의 상봉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먼발치에서 잠깐 바라만 보다가 버스에 승차한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  버스 뒤쪽에 있는 좌석에 앉아서  진눈깨비가 나리는 도시를 차창 너머로 감상하며 따뜻했던 그날들을 회상한다.


친구와의 소통이 전화가 있었지만 편지를 많이 이용했다. 적막한 밤에 펜을 들어 친구를 떠올리며 쓰는 편지 맛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이었다. 주고받은 편지를 읽으며 가슴에서 잔잔하게 퍼지는 그리움과 감동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밤새도록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고 학교 가는 길에 우표를 사서 붙이고 빨간 우체통에 넣는 일은 설렘이다.  우체부 아저씨가 수집해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답장을 기다린다.  매일매일 우체부 아저씨를 목 빠지게 기다린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은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같아 답답하다. 우체부 아저씨 오는 시간을 기억해 두었다가 미리 대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편지를 받는다. 편지를 받고 기뻐하면서 허리 숙여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편지봉투를 뜯어서 읽어 내려가는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다.


편지에는 소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친구의 마음이 들어가 있어 더 좋다. 고민의 흔적도 있고 비밀도 있다. 글씨체를 바꿔 주며 써 내려가는 글에는 그리움의 향기가 묻어 있다. 편지 말미에는 감성 가득한 시도 있고 그림도 그려서 보내기도 한다.  꽃잎이나 나뭇잎 말려서 보내주면 친구의 마음 같아서 소중하게 간직한다.   


편지를 쓰기 위해  꽃 편지지와 꽃 편지봉투를 사러 문방구에 자주 갔다.  계절을 나타내는 그림, 감성을 자아내는 그림과 색채감이 다양한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모두 구매할 수 없어 아쉬워 구경하는 시간만 늘어난다. 고르고 골라서 선택된 편지지 위에 친구를 생각하며 쓰는 변지는 설렘, 그 자체다.


 펜을 잡으면 할 말은 왜 그토록 많았는지. 평소 얌전한 내가 무색할 만큼 없던 말도 생각이 난다.  한번 쓰면 4장 이상은 기본이다. 10장을 넘길 때도 많다. 10장을 꽃 편지지에 다 채우지 못할 때면 원고지를 이용한다.  원고지를 세로 방향으로 칸은 무시하고 줄만 맞춘다. 초록색 펜으로 써 내려간 편지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꽃 편지지 못지않은 감성이 완성되는 것 같다. 처음 10장이 넘는 두툼한 편지지를 보고 언제 다 읽을지 걱정했던 첫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빠져들어서 금세 읽어 버린다는 친구 말이 생각나서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그려진다.


이제 손 편지를 대신하는 전자기기가 있어서 기다림이란 정거장도 없이 훅 갔다가 훅 돌아온다.

간편함에 익숙해서 손 편지는 추억 속에 잠자고 있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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