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향기로운 민정 Jan 22. 2024

눈 오는  100-71

#책과강연#백백글쓰기#14기#눈#눈 싸움

아침에 창문을 열어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다.  눈 덮인 세상에 고요함이 묻어있다. 머리부터 말끝까지 눈만 남겨두고 완전히 무장하고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  집 앞에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이 얼어 있다.  빗자루를 찾아 눈을 쓴다.  눈 위로 부는 바람이 얼음 알맹이 같다. 골목 사이사이에 빗자루 소리가 들린다. 다들 집 앞의 눈을 쓸고 있는 듯하다.


고등학교까지 다녔던  시골 마을도 그랬다. 눈이 오는 이맘때쯤이면 겨울 방학이었다.  방학이라는 이유로  게으름을 붙잡고 늦잠을 잘 만도 했지만 아버지는 용납하지 않으셨다. 7시 30분이면 아침 식사를 어김없이 해야 했고 밥 먹기 전에는 마당을 쓸거나 집 앞 골목을 쓸고 와야 했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아침에도 어김없이 눈을 쓸어야 했다. 빗자루를 들고 대문 밖을 나가면 집집마다 집 앞을 쓰는 모습들이 곳곳에 있다.

집 앞을 쓸다 보면 경계가 모호해진다.  우리 집과 옆집을, 우리 집과 앞집을 선을 긋듯이 나눌 수 없다. 쓰는 김에‥., 쓰는 김에 ‥.  하다 보면 영역이 상당히 넓어진다. 기분은 좋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친구 집이 있다. 뒤늦게 눈 쓸려고 나온 친구 인사 대신 눈을 뭉쳐서 던진다.


눈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도전장과 같은 것이다.  눈싸움이 시작된다.   옆에서 눈사람 만들던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보통은 남자와 여자로 편이 나뉘지만, 즉흥적으로 시작되는 눈싸움은 집 위치를 중심으로 편이 나뉜다.  남자아이들이 뭉친 눈덩이는 너무 단단해서 돌멩이랑 다름이 없다. 손아귀에 힘이 없는 여자아이들은  아무리 힘을 주어 뭉쳐도 그 단단함을 따라갈 수가 없다.  돌멩이 같은 눈 뭉치에 속도가 붙어서 맞으면 눈물이 핑 돌고,  대낮 하늘에도 별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렇다고 재밌게 노는 마당에 우는 건 비겁하다. 힘주어서 뭉치는 시간이 길면 공격당하기 쉽고, 맞지 않으려면 신나게 도망가느라 바쁘다.  공격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용기가 필요한 도전이다. 차라리 도망을 선택하는 것이 상책이다. 도망가다가  눈을 뭉치면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갖는다. 던지고 피하고, 뭉치고 도망가며 온 동네를 휘젓고 뛰다 보면 한겨울에도 땀이 날 정도로 치열하다. 눈 뭉쳐서 던지는 시간도 못 갖고 눈 뭉치가 무서워 도망가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 적들에게 눈 뭉칠 틈을 주지 말아야겠다.' 도망을 빌미로 냅다 집 쪽으로 달린다. 집 앞에 둔 빗자루를 잡기 위해서 뛴 지도 모르고 따라오는 적들이 반갑다. 숨을 고르며 적들이 가까이 올 때를 기다린다. 성큼성큼 적들이 다가오며 던지는 눈덩이를 빗자루를 휘두르며 부숴버리고 막아버림에 집중한다. 손에 쥔 눈 덩어리가 손에 없어질 때를 기다린다. 멈춰서 눈을 뭉칠 때 달려가서 빗자루로 얼굴을 향해 눈을 쓸어 흩뿌린다. 눈 폭탄에 당황한 적들이 눈도 못 뭉치고 도망간다. 뒤를 따르며 신나게 눈을 흩뿌린다. 눈 뭉칠 시간이 필요 없으니 많은 적들을 대응할 수 있다.  번뜩이는 전술에 감탄했는지 다들 빗자루를 들고 나온다. 이제는 속도전이다.  차가움을 잘 견디고 벼락같이 쏟아붓는 눈 양을 감당하고 피할 수 있는 민첩함이 좌지우지하는 싸움이 된다. 이쯤 되면 편이 필요 없다 가까이에 있는 모두가 적이다. 좌우, 앞뒤, 사방팔방 모두를 방어와 공격이 가능하다.  비명과 웃음소리가 동네가 떠들썩하다. 아이들이 시간을 잊고 눈싸움을 멈추게 하는 소리가 있다.  " ○○야! 밥 먹어" 엄마의 목소리가 휴전을 선언한다. 눈싸움엔 마당비가 아니라 실내나 부엌에서 사용하는 플라스틱 빗자루가 최고다.

작가의 이전글 거기서 뭐햇! 100-7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