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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스티스 Jul 27. 2022

한국의 장마를 그리워하다

캘리포니아 여름 나기

미국에 온 지 반년이 다 돼간다. 미국과의 허니문 기간이 끝난 건지 요즘들어 부쩍 한국 생각이 난다. 


사실 그냥 생각나는 정도가 아니다. 감성이 깊어지는 밤에는 사무치도록 그립다. 한국에서 나는 늘 바쁘고 찌들어 지냈던 것 같은데 한국의 무엇이 이토록 그리운 걸까.


최근 SNS에서 우연히 본 사진 한 장이 내 감성에 불을 지폈다. 해가 저무는 정동길에 연인이 두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었다. 장마철 폭우가 연인이 마주잡은 우산 위로 쏟아내렸고, 빗물이 그들의 신발을 계곡물 발 담그듯 적셨다. 축축하면서도 서늘한 밤공기가 수만 킬로미터가 떨어진 이곳에서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정동길은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도 운치가 있다. 밤이되면 적당히 좁고 조용한 길에 은은한 조명이 켜진다. 온갖 과제를 떠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 이 골목에만 들어서면 고즈넉한 아름다움에 빠져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기분 전환이 됐었다. 이 비오는 정동길 사진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부장과 동료들이 빗길을 저벅저벅 걸으며 점심 약속 장소를 향해 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순간 흠칫 놀랐다. 이 정도로 그리운 것인가하는 생각에. 

정동길을 끼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삼청동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어두운 빗길에 찍은 사진이었지만 장소가 정독도서관 앞 사거리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대학생 때 이곳에서 데이트도 했었고, 취업준비를 한다고 들락날락했던 추억의 장소였다. 밤이 되면 도서관 화장실에서 경복궁에 있는 석탑을 볼 수 있는데 화장실 운치마저 끝내주는 곳이라며 감탄하곤 했었다. 서울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대답할 수 있는 곳.  


그동안 미국에 오고나서 큰 불평불만 없이 지내는 스스로를 지켜보며 잘 적응하고 있다고 여겨왔다. 영상통화나 문자로 가족, 친구와도 수시로 연락할 수 있고, 온라인 뉴스로 한국 소식을 실시간 접할 수 있으니 한국에서 사는 듯 미국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 몇장에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을 마주친 것 마냥 무너져내린 것이다. 


어떨땐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려오기도 했다. 사진 한 장에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장소의 공기와 소리, 사람들의 움직임들이 모두 떠오르며 잠들어 있던 온몸의 감각을 깨워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가장 꽂힌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장마’였다. 한국에서 걸려오는 안부 전화는 대부분 ‘장마가 너무 지긋지긋하다’는 소식으로 시작했다. 전화를 할 때마다 지금도 비가 오냐고 물으면 어김없이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고 하는데 나는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은근히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던 것 같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맑고 쨍한 날씨가 매일 이어지는 이곳을 부러워하지만 나는 왠지 흙내음이 나는 축축한 비냄새가 그립다. 이곳은 사막 기후라 여름엔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 얼마 전 비가 한 번 왔었는데 너무 드문 일이라 만나는 사람들마다 비 얘기를 꺼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바닥을 살짝 적실 정도의 적은 양이었지만 집안에서 어둡고 흐린 하늘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으니 정말 오랜만에 감상에 젖어들었다. 약간은 울적해지려는 이 기분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곳 캘리포니아 햇살은 사람들에게 조금도 우울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듯 낮이되면 어김없이 사방을 비춘다. 햇볕이 세로토닌을 활성화해 항우울제 역할을 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학설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여기 햇볕은 너무 뜨거워서 외출할 때 어떻게하면 햇볕을 피할 수 있을지만 늘 고민한다. 낮에 잠시 산책을 하거나 이웃집에 들를 일이 생겨도 햇볕이 가장 강한 오후 3시가 되면 주저없이 외출을 미룬다. 

집 안에서도 햇볕 피하기는 계속된다. 외출을 하지 않더라도 아침에 일어나 선크림을 꼼꼼히 바른다. 햇볕이 쨍하게 내리 쬐는 시간엔 집 안에서 바깥 풍경을 보는 것도 힘이 든다. 눈이 부셔서 오랫동안 시선을 머물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음침한 기분에 빠져들어 감상에 젖는 것을 즐기는 나로서는 가끔은 이런 쨍한 날씨가 견디기 힘들다. 조금은 감상에 빠져야 생각도 많아지고 글감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곳은 당최 그런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낮인데도 어두컴컴한 한국의 장마철이나 영화 <트와일라잇>의 배경인 일년 내내 비가 내리는 워싱턴주의 ‘Forks’라는 마을을 떠올리며 어둡고 축축한 기분에 빠져든다. 


우울증을 앓거나 감정기복이 심한 사람일 수록 일조량이 확 느는 봄에 ‘봄을 탄다’는 분석을 본 적이 있다. 아마 나도 이곳 캘리포니아에서 ‘여름을 타고’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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