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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스티스 Mar 29. 2023

병원에 동행한다는 것은

아이가 아팠다

아픈 누군가를 위해 병원에 동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주말에 아이가 아파 병원에 다녀왔다. 일요일 새벽부터 열이 나더니 오전에는 많이 불편한지 칭얼대기 시작했다. 콧물이나 기침, 가래 등 감기 증상은 보이지 않아 중이염이나 요로감염, 돌발진 정도를 염두에 두고 얼전케어(urgent care)로 향했다.


일요일 점심 시간이라 환자들이 꽉 차있진 않았지만 여느 미국 병원이 그렇듯 대기는 기본 한 시간이었다. 품에 안긴 아이는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며 축 늘어져있었다. 새벽에 아이를 지켜보느라 잠을 설친 우리 부부는 병원 로비에 설치된 티비만 쳐다보며 아무말 없이 있었다.


아이의 이름이 불리고 진료실에 들어가서도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한국처럼 의사 오피스에 들어가 진료를 받는 것이 아니고 작은 진료실에 환자가 대기하고 있으면 의사가 회진을 하는 방식이었다. 간호사가 체온을 쟀을 땐 집에서 측정했을 때보다 훨씬 높은 화씨 104도(섭씨 40도)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그게 섭씨로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 당황한 표정으로 있자 간호사가 곧바로 해열제를 투여했다.


의사는 열 외에 특별한 증상이 없으니 소변검사를 하자고 했다. 아이는 아직 대소변 훈련이 안 됐기 때문에 비닐 주머니를 부착하고 기저귀를 차고 기다렸다. 간식과 물을 계속 먹였지만 체온이 워낙 높아 아이는 쉽사리 소변을 보지 못했다. 아픈 아이는 힘들어했다. 평소 잘 보여주지 않는 유튜브 영상도 보여주고 책도 읽어줬지만 벌게진 얼굴로 칭얼거림을 멈추지 못했다.


한 시간 넘게 창문도 없는 좁은 방 안에 있었다. 서서 잘 버티던 남편도 좀 앉으라며 의자를 권하자 망설임 없이 앉았다. 나도 의자에 몸을 기대었지만 임신 후기의 몸으로는 어떤 자세에도 숨이 가빠왔다. 이러다가 나까지 병을 얻어 나가는 건 아닌가 싶었다.


중간 점검을 하러 들어온 의사는 녹초가 된 우리 세 식구를 보더니 밖에 나갔다가 아이가 소변을 보면 다시 들어와도 된다고 했다.


병원 로비 문을 열고 나오니 햇볕이 뜨거운 여름 날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기에서도 초여름의 풋내가 느껴졌다. 두 시간을 병원에 갇혀있다 나오니 마치 전혀 다른 세계로 공간 이동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아이에게 줄 마실 것을 산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떠돌다 스타벅스 드라이브 스루에 줄을 섰다. 아이도 햇볕을 보니 컨디션이 나아진 건지 웃기도 하고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오전 열한 시에 집을 나섰는데 돌아오니 오후 네시였다. 아이는 마침내 소변을 봤고, 염증 소견이 나와 항생제 치료를 시작했다. 한숨 돌리려 안방 욕실에 들어와 거울을 보니 얼굴이 시커멓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하루 새 오 년은 확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갑자기 모든 게 너무 힘들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한 시간 넘게 갇혀있었던 창문 없는 좁은 병실, 로비에서 아이를 품에 안고 티비만 멍하게 바라봐야 했던 지루한 시간의 기억들이 집까지 따라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진짜 힘들다.”


이날 첫끼를 포장해서 막 들어온 남편에게 아이를 키우며 한 번도 내뱉어 본 적 없는 말을 했다. 마찬가지로 시커먼 얼굴을 하고 있던 남편은 씨익 웃더니 “그러게”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는 밥을 먹고 다시 주말에 못 본 장을 보러 마트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왠지 그 짧은 대답과 이후의 말이 알 수 없는 위로가 되는 듯했다.


힘들다고 말하고 나니 또 기운이 났다.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조차 없어 옆에서 뽀로로를 보고 있는 아이 옆에 가만히 누웠다. 문득 몇 년 전 새벽 응급실에 나를 데려다준 회사 동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자리에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잔뜩 마시고는 저혈압 쇼크가 왔었는데 집 근처에 살던 동기 두명이 병원에 데려다주고 밤새 같이 있어줬다.


한 번은 대낮에 커피를 마시다 호흡곤란이 와서 응급실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동행해 줬던 친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했었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위해 병원에 동행해 주는 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봤다. 내가 낳은 가장 소중한 자식도 병원에 데려가고 지루한 대기 시간을 견디고 아픈 투정을 받아주는 일이 이리도 고단한데 남을 위해서라면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


위급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 있다면 나도 주저 없이 병원에 동행했을 것이다. 자발적이든 그렇지 않든 이 일이 매우 수고로운 일임은 분명하다. 가족간이라고 해서 수고의 무게가 덜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온갖 걱정으로 정신적인 고통은 더 클 테니. 어릴 적 늘 나를 데리고 병원에 다니셨던 엄마에게 고맙다고 말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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