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테비 Mar 15. 2024

이보다 J형

J 중에 J형 직군

“엄마 T야?”

청소년이 자주 하는 말이다.

“아니, F인데.“

“뭐라고? 엄마가?!!! 엄마는 절대 절대 F 아니야. MBTI 다시 해봐.”

청소년이 보는 앞에서 MBTI 검사하고 바로 보여줬다. F형으로 나온다.


실험실 퇴근메이트와 퇴근하는 길에 가끔 청소년이 동승하기도 한다.

“이모, 우리 엄마가 F래요. 믿겨요?”

“어, 엄마 F 같은데?”

“네?!!!”


나는 청소년을 포함한 가까운 사람들이 보기에 T 같지만 사회적 성향은 F다. 드라마나 책을 읽어도 F다. 미디어에 몰입하면서 감정이 켜켜이 쌓이다 보면 공감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다. 사회적 성향이나 타인이 나를 보는 성향이 F의 감정이라면 계획에 있어서 어떨까. 나는 J형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J다. 20대 30대만 해도 까칠하고 까탈스럽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 40대가 되면서 아니면 살이 붙으면서 동글동글 다듬어졌는지 유순하다. 계획도 점점 무계획으로 흘러가는 것 같고. 다시 생각해도 나는 J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고 움직이니까. 시, 분 단위가 아닐 뿐.


그렇지만 시, 분 단위로 쪼개서 평일 매일을 보낸다. 손목시계가 없으니 핸드폰 시계 보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고, 수시로 벽시계를 보는 버릇(?) 습관이 몸에 새겨져 있는지 모른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다. 오늘도 출근해 인사 후 가장 먼저 묻는 말은 ‘선생님, 동물사 몇 시에 들어갈까요?’다. 그때부터 하루 일과가 쫙 짜인다. 대부분 회사원들이 그렇잖아 하겠지만, 우리 일에는 시간의 특수성이 있다.


지금 일하는 실험실은 굵직하게 덩어리로 일하는 기분이지만, 예전에 일 할 때는 작은 덩어리 일을 몇 개씩 엮어하는 기분이었다. 하루에도 몇 개 프로젝트에 걸쳐서 몇 가지 실험을 수행했다. 예를 들면, 세포에 약을 처리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약을 몇 시간 처리하는지도 제각각일 때가 있고, 약을 치고 세포를 모으기도 하지만 기계 측정하는 실험도 있다. 그땐, 약물 스크리닝 작업이 내 업무였다. 약물 스크리닝은 후보군 약물 중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간주되는 물질을 찾기 위한 작업이다. 100개 약물 중 걸러내고 걸러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스크리닝의 첫 단계 실험과 세포 약물 처리 실험, 기계 측정 실험이 한꺼번에 있는 날이면 모든 스케줄을 골고루 끼워 맞춰야 한다.


세포 약물 처리가 6시간짜리라고 하면 오자마자 준비하고 약물부터 처리한다. 세포 실험에 들어가는 배양액들을 미지근하게 데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면 이 시간 동안 기계를 미리 켜놔야 한다거나(배양액처럼 기계도 잠 깨우는 시간이 필요해) 후보군 약물을 꺼내서 라벨 작업을 한다거나 하는 밑작업도 한다. 세포 실험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나머지 두 실험 중 하나를 중심으로 실험을 하고, 기계 반응이 짧게는 1시간, 혹은 2시간짜리가 있다면 그 실험을 또 중간중간 넣어야 한다.


실험하다 보면 10분 남네, 그러면 지금 또 잠깐 다음 실험 준비 해 놓을까 하고 몸을 움직인다. 기계 측정 하는 시간 동안 다른 실험을 또 끼워 넣는다. 정신없이 이 공간에 있다가 저 공간에서 또 실험하고, 그러다 기계 앞에 있기도 하고. 실험실 안에서만 만보 걷기가 가능했다. 전 직장에서 내 생활은 그랬다. 어쩌다 시간이 비면 사람이 멍해진다. 그럴 땐 또 정신 차리고 실험 노트 작성도 빼먹으면 안 된다.


동료들이 바빠 보인다고 하는 소리가 듣기 좋기도 했다. 이상한 변태 마음인가. 일 중독이었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몸을 움직인다는데 희열을 느끼는 편인 것 같다. 여기 실험실은 이 정도로 일 종류가 많지 않다. 결과를 보는 과정이 길다. 동물 실험 기반이라 세포보다 기간이 길고 동물을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지루함도 있다. 동물 실험의 결과를 보기 위해 동물을 희생하고 나면 거기서 얻는 수확물(대부분 조직일 테다)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조직의 변화를 보기 때문에 대부분 형광현미경 촬영을 한다. 형광현미경 촬영은 조직에 형광을 반응시켜야 한다. 형광은 안티바디라고 하는 항원-항체 반응을 기반으로 한다. 조직은 대체적으로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항원-항체 반응 원리를 이용해 실험이 이루어진다.

항원-항체 반응을 기반으로 형광을 붙이는 작업을 형광염색이라고 한다. 지금 실험실이 논문 투고 준비 중이라 몇 번의 형광 염색과 현미경 사진 찍기를 하고 있다. 형광 염색도 기본 이틀은 걸리고 현미경으로 사진 찍기 위해 또 하루를 쓴다. 실험 시작 하고 몇 시간 뒤에 끝나는 과정이 생각보다 없다. 대부분 며칠씩 걸린다. 실험과정 중에 wash라고 해서 스텝과 스텝 사이에 보통 wash 과정이 있다(씻기라고 하기에 뭔가 직전 단계 실험이 씻겨나가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wash 그대로 표기하겠다). wash 하는 시간도 몇 분씩 잡아먹기 때문에 하루치 실험도 기본 몇 시간씩 걸린다. 그러면 점심시간 전 오전에 실험을 시작하거나 끝맺어야 하는 시간도 정해져 있기도 하고 반응을 2시간씩 해야 한다면 이 시간 동안 밥을 먹고 와야 한다. 때로는 40분 안에 밥 먹고 와야 해요,라고 동료들에게 말하는 날도 생긴다. 그리고 오후 실험 시간도 계획해야 한다.


며칠 전 하루 일과표다. 2종류의 실험을 한꺼번에 하면서 13:30분부터 갈라져 실험하는 일과다. 동료가 포스트잇에 시간표를 적어 실험테이블에 붙여 놓았다. 나는 대체적으로 머릿속으로 시간표를 집어넣는 편이고, 동료는 시각화하지 않으면 헷갈린다고 적어 놓는 편이다. 같이 실험을 하기 때문에 뭐든 상관없다.


09:20-10:00 상온 실험 준비

10:00-10:30 Wash

10:30-11:30 연두색 발현 항체 반응

11:30-12:00 Wash

12:00-13:00 빨간색 발현 항체 반응

13:00-13:30 Wash => 여기서부터 실험이 갈라짐

13:30-13:40 세포핵 염색 

13:30-14:30 세포핵 염색 Sample 마무리 => 한 종류 실험 끝

13:40-14:10 Wash

14:10-15:10 Sample 마무리 => 나머지 한 종류 실험 끝




30분도 모자라 10분 단위로 쪼개서 적어놓은 표를 보며 이보다 더 J형으로 일할 수 있을까 하고 놀랐다. 어느 초등학생의 방학 생활 계획표 같다.


실험이 끝나 쓰레기를 버리고 도구를 세척하고 테이블 위를 알코올로 닦고 개인 책상으로 돌아가면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알찬 시간을 보낸 뿌듯함도 밀려온다.

실험실 일이 이렇다. 여느 회사의 프로젝트는 기간이 중요하다면 실험실은 기간 못지않게 시간이 중요하다.


큰일이다. 논문 투고 기간이 정해져 있는데, 세포 실험이 갑자기 안 된다. 아!! 놔!!!!


표지 이미지 : pinterest, Jennifer Gillespie

형광현미경 촬영 세포 이미지 : 네이버 검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