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2
지난 봄부터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다. 딱히 무얼 위한 건 아니다. 유용성을 생각한다면, 글쎄, 미국이나 유럽 여행을 가게 된다면 써먹을 수 있으려나. 미국에도 히스패닉 인구가 워낙 많으니 간단한 의사소통 문장을 알면 편할 테니까.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혜택일 테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시작한 건 아니다.
굳이 목적이라면 자기 만족 혹은 자기 계발이라고 해야 할까. 새로운 언어를 배워나갈 때의 즐거움을 위해서라고 해야 하나. 40대지만 새로운 것—특히나 언어!—을 배울 수 있다는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더 넣어주기 위한 발버둥인가.
내가 아는 스페인어라고는 “올라”와 “그라시아스” 그리고 숫자 1, 2, 3, 4 정도였다. 사실 고등학교 1학년 때 토요일마다—토요일에도 학교를 갔던 세대이다—두 시간인지 세 시간이 몰아 있었던 제 2외국어 시간에 스페인어를 공부한 적이 있다. 고등학생에게 제 2외국어가 필수였으니 시험용으로 잠시 배우고 고2때부터는 단 한 마디 해본 적 없는, 그래서 기억에서 모두 사라져버린 언어였다. 생각해보면 그래도 1년을 배운 셈인데 어떻게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는지 놀라울 정도이다.
어쨌든.
백지와 다름 없는 상태의 스페인어를 4월부터 갑자기 독학해보겠노라 시작했다. 알파벳부터 시작하는 책을 사고, 유튜브를 병행하며 조금씩 읽고 말하기를 따라했다. 두 달만에 기초 1권을 떼겠다는 야심찬 각오는 게으름에 밀려 몇 날 몇 주씩 스페인어를 잊고 살기도 했다. 그때마다 둘째가 “엄마 오늘 스페인어 공부했어?” 자꾸 물어봐서 모른 척 하기 바빴지만.
다시 마음을 다져 작업하러 오가는 길에 유튜브 강의를 듣고 책도 한 과씩 진도를 빼 드디어 기초 1권을 끝냈다. 무려 네 달 반 만에.
그리고 역시. 책 한 권 끝냈다고 “나 이제 스페인어 좀 해!” 라고 감히 할 수준조차 안되지만—이제 겨우 “나 요즘 스페인어 배우고 있어 Últimamente estoy aprendiendo español.” 말하는 정도이다—역시나 밀려오는 뿌듯함. 언어라는 것이 보통 배울수록 복잡하고 어려워지는 게 사실이지만 초보일 때만큼은 뭔가 대단히 많은 것을 배우는 것처럼, 하나씩 습득하는 즐거움이 커서 좋다. 게다가 책값 외엔 돈도 안드는 배움이라니 좋은 세상.
자꾸 돌아서면 까먹는 바람에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한다. 왕년엔 기억력 하나로 잔머리 굴린다고 학원선생님이 약이 올랐는지 분필을 얼굴에 맞추며—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이없다—분해 했는데, 내 기억력 어디 갔나. 냄비에 삶아먹었나, 오븐에 구워먹었나. 영어와 비슷한가 싶다가도 너무 다르고, 명사와 형용사엔 성性까지 있어 고약하다. 왜 “그릇”은 남성 명사이고 “창문”은 여성명사란 말인가.
이제 고작 기초 2권째이다. 내년 초에 예약해 둔 캘리포니아 여행에서 몇 마디 써먹으려나. 적어도 “화장실이 어디에 있나요?”는 물어볼 수 있을 텐데—답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초적인 문장이지만, 한 마디씩 할 수 있는 말이 늘어난다는 것이 제법 성취감이 크다. 어디 가서 써먹지도 못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수준에 끝나는 게 아쉽지만. 점점 어려워지겠지만 올해 안에 세 권으로 이루어진 기초를 끝내보리라 다짐해본다. (자꾸자꾸 여기저기 소문 내서 공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려는 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