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29
매일 챙겨먹는 영양제 개수가 늘어난다. 많이 안 먹는 편이라 해도 오늘 보니 한 개가 더 늘었다. 의사가 매일 먹으라고 처방해줬으니 먹는 철분약, 알러지가 있으니 먹는 알러지약, 먹으나 안먹으나 그다지 큰 차이는 못느끼지만 좋다고 하니 먹는 유산균, 그리고 아이들 유산균을 사니 덤으로 딸려와 먹어보는 루테인. 여기에 가끔 생각나면 칼슘약도 먹고, 또 가끔 생각나면 먹는 밀크씨슬도 있다. 이상하게 종합비타민은 공복이 아니더라도 먹으면 메슥거려서 잘 먹지 않게 된다. “종합” 중 어떤 성분이 안맞는 건지 몰라 ‘그냥 안먹고 말지’하고 비타민은 챙기지 않는다. 이게 다 내 몸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려나. ‘건강하게 살아야지’라는 생각에서 먹는다기보단 그때 그때를 버티기 위해 먹는 기분이다.
40대가 되도록 기본적인 의료 보험 외에 다른 보험을 들어본 적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없지는 않다. 스무살 유럽 여행 갈 때 소액으로 가입한 여행자 보험, 그리고 유학시절 필수였던 학교 의료 보험이 있었으니. 그외에는 보통 말하는 “실비”니 “생명 보험”이니 하는 것들은 (부끄럽지만) 뭔지 모르고 살았다. 다이아수저, 금수저라 그런 것 없이도 천하무적이지, 일리는 없고, 무언가를 대비하거나 앞의 큰일을 생각하며 지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가정 환경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생각하는데, 어느덧 70대이신 부모님이 지금껏 보험 하나 없이 지내셨으니 강건하심에 다행이라 할지 무심함에 놀라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다 몇 주 전 문득 “니 암보험에 대해 아나?”하고 큰 물음표를 냅다 던지신 친정아부지. 여든이 내일 모레인 연세에 갑작스레 당신 건강이 염려스러워셨던 걸까. 아마 주위에서 누구는 무슨 암이라더라, 누구는 어디 수술을 받았다더라 하는 소식이 잦아지니 이제야 뭐라도 준비해야 하나 싶으셨나 보다.
언니 말에 따르면 10년 전쯤 “하나 들어두시지요” 라는 제안 때 귓등으로도 안 들으셨다는데, 뭐랄까, 그런 “준비”를 굉장히 덧없다 생각하신 양반들이다. 그런 준비는 해봤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어쨌든 갑작스러운 아부지의 질문 덕에 몇 통의 문자와 전화 후 어느 날 오후 두 시 생애 처음으로 집 근처 카페에서 보험설계사와 마주 앉게 되었다.
세상에는 생명보험과 손해보험을 비롯해 그렇게나 여러 종류의 보험이 있구나. 게다가 나처럼 애매한 유병자도 가입이 가능하다니. 나 같은 경우엔 임신 중 혈액검사로 몸에 신기한 게 있는 걸 발견했는데, 이건 평소에 아프지는 않지만 몸이 정상은 아닌 좀 이상한 경우라 정기적으로 피검사를 받고 있다. 그러고 보니 딸내미 몸에 뭐가 있다는데도 “그냥 모르고 살았으면 그냥 지냈을 걸?”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부모님들이었다. (그저 쿨내 진동하는 거라 생각하기로.) 그 이후로 매일 철분약을 먹고 있는데, 이거 한 알 챙기는 게 뭐라고 아직도 먹는 걸 까먹기도 한다. 부모님들 보험 얘기를 듣다가 곁다리로 물어본 것 뿐이고, 나는 곧 큰 첫째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라 먼저 일어나 나와야 했다. 이러다 어느 순간 내가 받아둔 명함의 번호를 누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어디에 뒀더라 안보인다.
영양제와 보험 이야기를 쓰는 중 창밖에 툭툭 소리가 나서 보니 빨간 모자를 쓴 작은 딱따구리가 집 앞 나무에 앉아 나뭇가지를 부리로 치고 있다. 아이들 보여주게 동영상 찍어놔야지 생각했는데, 여기저기 돌아가며 툭툭 쪼아보더니 뭔가 맘에 들지 않는지 포로롱 날아가버렸다. 그래도 영양제 한 알보다 딱따구리를 지켜보는 일이 내 몸에 활력을 솟아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