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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 숨 Aug 17. 2023

아는 사람의 책

2023.8.16

지난 주말 서점에서 사온 책을 읽었다.

 

봄부터 읽어야지 생각만 하다 이제서야 읽는 책이다.

<<중급 한국어>>.

그러고 보니 서점에서 내가 읽을 책을 사온 건 참 오랜만이다.

어쩌다 여행지에서나 외출의 결과물로 사곤 하는 아이들 책 한두 권을 제외하면 ‘급할 것 없으니까’ 하고 조금이라도 할인받으려, 또 무겁게 들고 다니지 않으려 오프라인 매장을 이용하지 않는 요즘이다.

보통 보고 싶은 책, 사고 싶은 책이 생기면 메모해 두었다가 핸드폰 앱을 켜 주문하곤 했으니까.

그런데도 이번엔 "급하지 않음에도” 교보문고 현대백화점 판교점 지하2층점에서 책을 구매해 곱게 안고 데려왔다.


 

문지혁 선생님의 새 책.

문선생님과의 인연이랄까, 관계는 좀 독특하다.

“독특하다”는 말은 그야말로 그 관계를 특별한 듯 표현했을 뿐이고, “애매하다”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사람 얼굴을 정말이지 지독히 기억 못하는 나는 길거리에서 문선생님을 만나면 못알아보고 지나칠 지도 모른다. 선생님과 내가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한 건 다섯 번이나 되었을까.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건 뉴욕에서였다. 내가 막 뉴욕대 박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이미 뉴욕대에서 석사를 마친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그야말로 과 사람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소개받았던 것 같다. 한국인들끼리 모였던 것도 아니고, 이사람 저사람 과의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때에. 유학 생활이 이제 막 시작하던 때였고, 누가 누군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던 때였으니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도 잘기억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 동안 나는 두 번의 출산을 통해 기억이라는 능력을 엄청나게 상실했다.) 문선생님은 어떤 분인지 진심으로 잘 모르며, 서른 살의 박사 과정생은 사회생활 같은 것을 할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없었으니, 같은 뉴욕, 같은 학교에 적을 둔 한국인이라는 공통점 외에 아는 것 하나 없이 시간만 흘렀다. 내 기억으로는 밥은커녕 음료 한 잔 놓고 마주앉아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그러다 선생님은 한국으로 들어가셨고, 나는 또 치열하게 유학생활을 하다 소설책을 출간하셨다는 소식에 ‘오 내가 “아는” 사람이 소설을 냈어.’라며 책을 샀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페이스북 친구로 소식을 보기 시작하다가, 어쩌다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며—어떻게 팔로우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내가 검색했겠지—간간히 올라오는 피드로 누구나 아는 정보만 아는 그런 관계. 어떤 사람이 보기엔 “뭐야, 그냥 모르는 사람이네.” 라고 비웃을지도 모를 그냥 “아는 사람”일 뿐이다. 누가 봐도 길에서 마주쳤을 때 못알아보고 지나쳐도 이상하지 않을 애매한 관계. 아, 그래도 나는 선생님의 유튜브를 시청하고, 선생님의 책과 인스타그램 글귀를 보며 조금 더 익숙한 정도이다. “목소리도 모르는데”라고 쓰고 생각해보니 유튜브를 통해 선생님 목소리는 많이 들어봤군.


 

그러다 <<초급 한국어>> 책이 출간되었을 때, 감사하게도 나를 기억해주시고 “뉴욕 이야기”라 한 권 보내주고 싶으시다며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락을 주셨다. 그때 “소설가”에게 본인의 책을 받았던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내 주위에 소위 “문단에 등단”한 작가는 없었으니까. 주위 선생님, 선배, 친구 등이 전공분야 서적—미술사, 공예사 등의 인문학 분야—을 쓰고 출판하긴 하지만 순수 문학은 문선생님이 유일한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책을 받은 “사건”은 희한하게 내 자부심 지수를 높여주는 어떤 마음 속 스티커처럼 붙어 있다. “아는 소설가 있음. 진짜 소설가임.” 내가 책을 쓴 것도 아니고, 가까운 지인도 아닌 애매하게 아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지적 허영심이 차 있는 건가.


 

<<중급 한국어>>는 그렇게 내가 아는 사람의 새 책이다. 얼른 보고 싶었지만, 먼저 사둔 다른 책에 밀리고 밀리고, 다른 일에 치이며 이제서야 사 읽었다. “오프라인”으로. <<초급 한국어>>가 뉴욕 이야기라 보내주셨다고 하셨고, 실제로 내 뉴욕 생활이 많이 떠오르는, 글을 읽고 있지만 장면장면들이 사진처럼 떠오르는 책이었다면, <<중급 한국어>>는 지금의 내 상황과 더 맞닿은 게 많은 책이다. 결혼, 출산, 육아를 포함해 부모님과 여동생과의 관계 혹은 갈등, 직장과 진로 혹은 꿈—이라는 말은 40대의 화자나 나에게 너무 말캉거리고 아득한 단어 같지만—등 현실적인 문제들이 마구 튀어나오는데, 주인공과 내가 같은 연령대인데다 유학이라는 비슷한 배경이 있는 인물이라 더 공감가고 이해가 되는 걸까. 정말이지 어떤 문장들은 밑줄을 격하게 치며 별표를 그리고 싶었고, 어떤 부분은 한 추천인이 쓴 “특유의 지적인 위트”라 느끼며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게다가 책 속에 등장하는 고전들도 공교롭게도 내가 최근에서야 읽은 문학 고전들이 있어—제임스 조이스, 카프카, 폴 오스터 등—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책만 읽을 때 가려웠던 점을 긁어주는 해설도 들어가 있어 어찌나 시원했던지.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써본 분이라 그런가 예전에 인스타그램 피드의 짧은 글에서도 문학인의 정체성이 너무 드러나 “이것 좀 봐봐” 하며 옆의 사람에게 막 읽어보라고 한 적도 있다. 몇 해 전 크리스마스 관련해 짧은 문장들을 올린 피드였는데, SNS 세상 속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 안가는데 잔뜩 멋만 부린 수많은 글 중 혼자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와 뭐야. 진짜 글쟁이는 인스타 피드 글도 다르네.” 라며 중얼거렸던 기억.

사실 세상에 수많은 작가가 있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책이 있지만, 그게 그저 남의 나라 혹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면, “아는 사람”의 책과 문장을 보니 한 번도 훈련 받아본 적 없는 문학적 글쓰기—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 사람이 하니 나도 할 수 있겠다’ 라서가 아니라 좀 더 가까운 세계로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저 세상 영역의 것이 조금이나마 이 세상의 가까운 이웃으로 다가온 정도랄까. 문선생님의 책은 내게 그런 의미로 좀 특별하다.



책을 읽고 나니 사실 잘 모르는 분인데도, 밥이라도 한 번 먹어요, 하며 문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기도 하다. 재채기하다 허리 나간 주인공 얘기 문선생님 경험담인가요? 저도 두 달 전쯤 자다가 기침하는데 허리 삐끗했어요, 같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지만 꼭 얘기해야 할 것 같은 말을 쏟아내며. 사실 문선생님과 나는 공통된 학교 생활조차 공유한 적 없는 진짜 애매한 사이인데. 그냥 아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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