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는 잔인하다

2022년에 꺼내 먹는 2021년의 글 <읽는 먹방>

by 덩이

트렁크에서 사골국을 담아 두었던 빈 용기를 발견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액체’라는 단어였다.

형님이 고아주신 소중한 사골곰탕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용기의 모양에 딱 맞게 그대로 담기는 액체의 특성은 용기를 벗어났을 때 위력을 발휘한다.

트렁크 바닥은 물론이고 누구 갖다 준다고 잠시 두었던 아이 동화책 전집, 신랑의 옷과 운동화가 구수한 사골곰탕에 정성스럽게 젖어있다.

4시간을 걸려 포항에서 달려올 때만 해도 그중 한 시간 반을 내가 운전을 했다는 사실에 뿌듯했는데......

오늘은 서로 피곤하니 간단히 비빔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쉬자 했는데......

쏟아진 사골국물이 모두 어디로 흘러내려갔는지 확인하기조차 두려운 이 상황은 화가 나는 걸 넘어서서 무력하게 만들었다. 내가 한숨을 폭폭 내쉬며 ‘아, 어떡하냐’를 연발하니까 아이가 불안해한다.

-엄마, 왜 그래? 무서워.

1박 2일의 일정이 신랑도 피곤했는지 여느 때처럼 괜찮다는 말을 시원스레 내뱉지 못한다. 트렁크를 대충 닦아낸 뒤 집으로 올라가 확인해 보니 용기 안에 한 그릇 정도의 양이 남아 있었다. 그 와중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맛을 볼 수 있겠구나. 살아남은 한 그릇의 사골곰탕은 진하고도 참 맛있었다. 계획대로 우리는 비빔면을 해 먹었고 길고 고되었던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신랑과 함께 셀프 세차장에 갔다. 트렁크 바닥을 다 들어내고 나는 난생처음 우리 차의 스페어타이어를 마주했다. 그 깊숙한 곳 구석구석까지 국물과 기름기가 흘러 있었다. 하루 사이 진하게 변질된 향기까지 깨끗하게 씻고 닦아내는 데는 두 시간 정도 걸렸다.

김영하 작가님이 그랬지.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다고. 대실패를 겪는다 해도 소설가로서 언젠가는 그 이야기를 쓰게 될 거라고.

나는 소설가가 아니지만 짧은 문장을 하나 건져냈다.

테두리를 벗어난 액체는 잔인하다.

쏟아진 액체는 잔인하다.


초복, 중복, 말복

2022년 8월 현재 그날을 다시 생각해봐도 참 희한하다. 그 먼길을 달려가야 하는데 무슨 생각으로 비닐이나 가방에 한번 더 싸지 않고 따끈한 국을 담은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만 덜렁 트렁크에 실었을까?

아마도 아무 생각 없었나 보다.

이전 11화냉이와 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