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에서 온수를 눌러 머그컵에 따르면 딱 120ml가 나온다. 거기에 노란 포장의 믹스 커피 두 봉을 뜯어 넣고 잘 녹인다. 커피를 잔에 먼저 넣지 않는 이유는 정수기의 물을 따르면서 커피물이 사방으로 튀기 때문이다. 잘 녹인 진한 커피에 얼음을 듬뿍 넣으면 뜨거운 물에 얼음이 어느 정도 녹는다. 두 바퀴 휘저어서 한 모금 마시면 달고 시원하다. 그렇게 한 잔을 마셔야 하루를 시작할 기운이 생겨난다.
커피의 맛을 알게 된 시기는 아마도 심부름으로 커피를 타드리던 초등학교 3, 4학년 때쯤이었던 거 같다. 멋지게 생긴 다리가 달린 화려한 커피잔에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두 숟갈을 넣고 가스레인지에서 삐익 요란한 끓는 소리를 내는 주전자를 조심스레 들어 뜨거운 물을 살살 부으면 달콤하고 구수한 향기가 촤악 퍼진다. 커피의 향이 맛보다 오만배는 더 좋다. 가루를 잘 녹인 뒤 숟가락으로 조금 떠서 간을 보면 설탕과 프림을 탄 커피는 아이가 먹기에도 구수하고 달콤하고 맛있었다. 집에 오신 손님의 취향에 따라 설탕이 하나가 들어갈 때도 있었고 프림 없이 말갛게 타드릴 때도 있었다. 내 입에는 설탕과 프림이 모두 들어가 연갈색을 띠는 커피가 제일 맛있었다. 어린애가 커피를 마실 수는 없기에 나는 하얀 프림과 설탕을 전지분유처럼 타서 먹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흰 우유에 멕스웰 분말 커피 한 봉을 넣고 흔들어 먹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커피가 있나 싶었다. 물에 타 먹는 것보다 더 부드럽고 고소하다. 야간 자율학습을 핑계로 커피우유를 자주 만들어 먹었지만 그 커피를 마시고 잠을 이겨낸 적은 별로 없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빨갛거나 노란색 기다란 봉지의 믹스커피를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출근하면 가장 먼저 종이컵에 믹스 한 봉을 뜯어 하루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한 잔이면 충분했는데 어느 순간 두 잔, 세 잔까지 늘어났고 한 번에 두 봉씩 몇 잔을 먹는 날도 많았다. 역류성 식도염의 가장 큰 원인은 식후 믹스커피 한잔이었으리라. 커피전문점의 바닐라 라테가 나의 최애 커피 자리를 늘 노리고 있지만 찐한 믹스커피를 마셔야 그날의 카페인이 충전된 느낌이다.
그렇게 커피를 먹어온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여전히 나는 커피믹스가 그 어떤 커피보다도 맛있다.
그러나 그것은 애증의 맛이다. 이젠 맛보다 건강을 더 생각해야 할 나이기에 매일 마시면서도 ‘이제 끊어야 하지’ 고민하게 되는 맛이다. 아메리카노나 히비스커스, 국화차 같이 달지 않거나 쓴 것들로 하루를 시작하는 날에는 많이 허전하지만 잘했어 잘 참았어하면서 오랜 당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날이 길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왕 사놓은 거 이것만 다 먹으면 아예 사놓지 말아야지 결심했다가도 몇 개 안 남은 믹스커피를 보면 불안해져 다시 한 박스를 사다 쟁여 논다. 그리고 또다시 시작한다. 이것까지만 마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