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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Mar 27. 2021

흑인 커뮤니티 학교, 도전과 추억

50대 새내기 교사의 고군분투기

흑인 커뮤니티 학교에서 마주한 현실


저소득층 흑인 커뮤니티 학교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사는 일상은  만만치 않았다. 힘든 도전이 매일매일 나를 기다렸다. 학생들의 수업태도와 행동이 언제나 큰 문제였다. 수업시간에 웅성웅성 떠드는 소리는 매일 다루어야 문제 행동이었다.  25명에서 30명의 학생들 중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이 반 정도다. 나머지 열댓 명의 학생은 내가 가르치는 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과 잡담을 하고 키득키득 웃기까지 한다. 수업에 방해가 되니 조용히 해 달라고 하면 무례하게 말대꾸를 한다. 일부러 더 큰 소리를 내고 수업을 방해한다. 의도적으로 소란을 피우고 나를 애먹인다. 세 번의 경고를 주었음에도 수업방해 행동을 멈추지 않으면  행동 평가서 behavirol referral를 써서 훈육실에 보낸다.


무례한 말대꾸, 의도적인 수업방해와 소란, 교사의 권고 거부 등은 매일 내가 가르치는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상황은 “칭총 칭총”이라는 아시안을 비하하는 표현이었다. 아이들은 이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복도를 지나가면서 입을 가리고 작은 소리로 “칭총 칭총” 혹은 “칭총 레이디”라고 말한다. 여러 명의 아이들이 지나가기에 누가 그 말을 했는지 특정하기 힘들다. 그럴 때면 이 일군의 학생들을 한꺼번에 교장이나 교감에게 보낸다. 그 인종차별적인 말을 한 학생을 찾아내는 일은 교장이나 교감의 몫이다.


인종 비하 발언을 한 학생을 교장이나 교감은 용케 잘 찾아냈다. 처음에는 이런 학생들에게는 하루 정학이라는 징계가 내려졌다. 이런 학생들이 많아지자 징계는 훈육실에서 1시간 반성하기로 가벼워졌다. 학교 측에서는 그 많은 학생들에게 다 정학을 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학교의 유일한 한국인 교사이자 동양인 교사였다. 인종 비하 표현으로 고생하는 유일한 교사이기도 했다. 교사 다수는 백인이었고 흑인 교사들도   있었다. 동양인이 거의 살지 않는 학구의 특성상, 동양인 교사인 나는 학생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존재였던 것 같다.


나의 학생들과 나에게 인종 비하 발언을 하는 다른 학생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 나는 너희 흑인 학생들의 친구다.” 흑인과 동양인은 미국에서는 마이너리티로 결국 같은 배를 탄 사회적 약자임을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나와 너희들은 함께 손을 잡고 인종차별에 맞서야 하는 친구다. 아이들에게 가슴으로 호소했다.


나의 뜻을 헤아리고 나를 응원해 주는 학생들도 많았다. 선생님 편이라고 나를 안아주었던 속 깊은 여학생들. 이 아이들을 보며 버텨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더 이상 나를 칭총 레이디라고 비하하지 않았다. 이 동양인 비하 언어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복도를 지나갈 때면 어디선가 이 말이 들렸다. 내가 가르치지 않는 학생들은 여전히 나를 그렇게 불렀다.


 아이들이 밉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미국의 빈부격차의 간극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의 부자 상위 50명이 미국 전체 인구  하위 50%가 지닌 부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부의 절반을 50명의 부자가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극심한 빈부격차는 인종이라는 문제와 더불어 복잡하게 드러난다. 많은 수의 흑인이 빈민이다. 흑인의 빈곤은 역사적, 사회적 배경과 원인이 깊다. 미국의 극우 세력은 약자, 소수자 사이의 분열과 이간질을 조장한다. 약자의 처지인 소수 인종, 흑인과 아시안의 갈등과 반목을 부추기며 불평등한 미국의 현실을 덮으려 한다. 흑인들의 분노를 약자  약자인 아시안들에게 돌리려는 것이다. 또한, 지배세력은 약자들의 연대를 두려워한다. 약자들의 분열과 분쟁은 불평등한 구조와 현실을 유지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학생들의 아시안을 향한 인종 폄하 발언은 이런 미국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아이들도 피해자일 뿐이다.


이 학구의 모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는 경찰관이 상주한다. 수업 중에 혹은 학교 안에서 폭력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도 수업 중에 학생들 사이의 폭행으로 경찰을 불러야 하는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 한 번은 두 여학생에 수업 중에 서로 밀치고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 그들에게 멈추라고 말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바로 오피스에 연락했다. 교장이 경찰과 함께 교실에 오자, 상황이 평정되었다. 총을 찬 경관의 위력은 크다. 교사의 말은 듣지 않아도 경관의 말은 즉시 듣는다. 이 여학생들은 2일의 정학 징계를 받았다. 남학생들의 폭력은 더 큰 문제였다. 의자나 책상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다른 학생들과 나의 안전에 위협을 느꼈다. 이럴 때는 먼저 다른 학생들을 복도에 대피시킨다. 오피스에 연락하면, 바로 경찰이 출동했다. 이것이 바로 경찰관이 학교에 상주해야 하는 이유였다.


이 학교의 훈육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응당의 대가를 치른다" 거다. 같은 학생들에게 정학이나 근신과 같은 징계가 반복되었다. 징계가 문제 해결의 방법은 아닐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는 돌봄과 보살핌이 필요하다. 가정에서 해 줄 수 없다면, 국가가 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이나 지원이 미국에는 없었다. 가난한 학구의 가난한 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부자 나라 미국에서  소외된 계급과 인종이 겪는 교육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며 고군분투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제발 아무 사고 없이 하루를 보내기를 소망하며 살았다.


결국, 문제는 구조에 있다. 구조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이 지역에는 더 많은 학교와 더 많은 교실과 더 많은 교사가 필요하다. 학교를 더 지어야 하고 교사를 더 채용해야 한다. 낙후된 학교 환경과 시설을 개선해야 한다. 학생들의 교육과 학습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교육 기자재가 필요하다. 음악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학생들에게 악기도 무상으로 지급되어야 한다. 질 좋은 방과 후 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해야 한다. 결국은 가난한 학구에는 돈이 없다는 것이다. 빈곤의 악순환은 교육에서도 반복된다.


흑인 커뮤니티 학교에서의 보람과 추억


2018년, 미국 교사 5년 차에도 나의 도전은 계속되었다. 이 흑인 커뮤니티 학교에서  쓰고 시린 경험도, 감동과 보람이 넘치는 순간도 함께 했다. 사랑과 연민에 찬 가슴으로 아이들을 대하였다. 때로는 고뇌와 절망으로 애를 태웠다. 이 기간 나는 기쁨과 고통을 왔다 갔다 하며 매일매일을 버텼다. 3년 전의 추억에 잠긴다.


한국 아줌마가 미국 교사 5년 차에 하고 있는 이 다채로운 경험! 저소득층 흑인 커뮤니티 중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내가 했던 20대의 그 치열했던 경험, 이민 초기와 미국 교사생활 초기의 역경이 없었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티칭의 즐거움과 보람도 크다. 내 경험과 세계관, 가치관을 아이들과 공유하고 아이들과 소통한다. 서로에게 전혀 새로운 문화가 교실이란 공간에서 만나 교류된다. 내가 소중한 이곳 아이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통로가 된다. 이 소통의 과정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


미국 학교 교육의 특징 중 하나가 교사에게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교재를 채택하거나 창조할 재량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7학년과 8학년 학생들을 가르치던 나는 뉴스 시청과 신문 읽기를 소재로 교육과정을 구성했다. 신문기사와 티브이 뉴스를 교재로 쓰고 있었다.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로 있었던 매사추세츠 코리아 평화 캠페인의 집회와 나의 인터뷰가 실린 신문기사를 읽고 뉴스 보도를 보며 읽기와 쓰기 능력을 기르는 수업을 하고 있었다. 어휘, 문장 구조, 독해, 청해, 요약하기 등을 수업 내용으로 다루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평화협정,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120명의 아이들이 모두 가슴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한국전쟁 종식과 평화협정 체결을 지지했다. 1953년 에 한국전쟁은 공식적인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중단되었다. 한반도는 잠시 전쟁을 쉬고 있는 상태다. 우리 민족의 뜻과는 상관없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70년을 살고 있다. 전쟁상태와 분단으로 인한 한국인의 고통과 상처는 깊다.' 이 아이들은 우리의 고통과 상처를 가슴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들의 눈빛과 표정이 그것을 말해주었다. 나의 학생들은 남과 북에 헤어진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기를, 나누어진 한반도가 하나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감동의 순간이었다. 나의 가르침이 학생들에게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히고 평화공존의 가치를 일깨우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의 신념을 학생들과 공유하며 그들의 지지를 받고 그들의 사고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진정 보람된 일이다.  나의 교육활동이 평화운동의 연장될 수도 있음을 새롭게 경험했다.


이런 감동의 순간이 이 커뮤니티에서의 도전과 힘겨움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매일 아침 비장한 각오로 들어서는 교실이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이 때로는 나에게 큰 도전을 던진다. 수업방해, 무례함, 동양인 인종 비하 발언, 폭력을 감당해야 하는 교실이다. 이럴 때는 단호하고 엄하게 학생들을 대한다. 내가 학생들을 사랑하는 또 하나 방식이다. 그 교실에서 아이들의 마음이 자라고 삶의 변화를 가져올 지식을 쌓아간다. 나의 교실은 도전과 보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이 곳에서 쓰고도 달콤한 미국 아줌마 교사의 일상이 이루어진다.


많은 아이들이 나를 이해하고 지지하고 따랐다. 흑인 학생들과의 함께 나누는 공감과 교감은 컸다. “오늘은 사표를 내야지라는 결심을 하고 학교 건물을 들어서지만, 그 다음날 다시 학교로 출근한다. 아이들과 부대끼며 느끼는 가슴 뭉클한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컸던 여학생 K는 나를 좋아하고 잘 따랐다. 교실 제일 뒷자리 앉아 종종 짝꿍과 잡담을 했다.  세 번 경고를 했음에도 계속 잡담을 하면, 그녀를 훈육실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여학생 K는 수업 중 빈번한 잡담으로 종종 훈육실로 보내졌다. 어느 날 훈육 담당 교감으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교감은 여학생 K가 나를 매우 존경하며 내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우리 선생님은 고국인 분단된 한국을 하나로 잇고 이산가족의 재결합을 위한 노력하는 평화운동가예요. 너무 멋지죠!  우리 선생님 활동이 신문과 방송에 나왔어요. 저는 선생님을 존경하고 좋아해요. 그래서 선생님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저도 왜 제 마음대로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말을 전해 들은 나는 눈물이  돌정도로 기뻤다. K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몰랐다.  아이의 진심이 느껴졌다.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쏟은 사랑과 정성이 헛되지는 않는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보람으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고 있다!


흑인 커뮤니티 학교에서의 감동과 보람에도 불구하고 역경과 어려움은 극에 치달았다. 이 일상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수업 방해와 복도에서 마주하는 인종 비하 발언은 점점 심해졌다. 수업 중 폭력 상황은 더 빈번해졌다. 그럴 때마다 경찰을 불러야 했다. 매일 아침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교실문을 들어서고 비장한 각오를 하며 주먹을 쥐는 생활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심한 스트레스로 방광염에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이러다가는 정말 큰 병에 걸리겠다 싶었다. 학기를 마치고 이 학교를 떠나기로 했다. 내가 즐겁게 가르칠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


사직 의사를 교장에게 밝힌 후, 나는 깊은 패배의식에 빠졌다. 흑인 커뮤니티에서 학생들과 같이 사랑과 신뢰를 쌓으면 가르치고 싶었다. 내가 쌓은 경험과 지식으로 학생들을 돕고 싶었다. 세상을  바로 보고 해석하고 그 중심에 서서 세상의 긍정적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돕는 교사가 되길 바랬다. 나의 소망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이제 이 힘겨운 일상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이 곳에서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포기한다는 패배감이 교차했다. 다시 교단에 설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경험보다는 암울했던 상황만이 나의 생각을 지배했다. 그러던 중 우연한 사건을 통해 나는 다시 용기를 갖게 되었다.  나의 가치, 교사로서의 자질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갑자기 교장실에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일지 궁금해하며 교장실로 내려갔다. 사임을 앞두고 있기에 이와 관련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교장실 문을 열자, 8학년 여학생 L이 앉아 있었다. (나는 이 학교에서 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를  정규 교과인 일반 영어수업 English Language Arts (ELA)로 가르쳤다.) 이 여학생은 자신의 ELA 기말성적이 부당하게 매겨졌다고 항의하러 온 것이다. 나에게 항의하러 왔으면 바로 해명을 들을 수 있었을 터지만, 내가 부당하게 성적을 주었다고 교장선생님에게 일르러 온 것이다. 권력의 위계를 잘 알고 있는 중학생이기에 나에게 항의하는 것보다 교장에게 항의하면 자신에게 더 유리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을 한 것 같다.


교장선생님은 이 학생이 자신의 성적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니 어떻게 성적이 산출이 된 것인지 설명해 보라고 했다. 성적처리는 전산화되어 있다. 학생들의 수업 참여, 수업태도, 수업시간의 과업 완성 정도, 프로젝트, 숙제 등 모든 항목에 대한 평가가 성적처리 시스템에 나와 있다. 나는 매일 학생들의 수업활동과 숙제와 관련한 내용을 꼼꼼하게 평가하여 성적 시스템에 기록했다. 모든 근거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학생은 수업 참여나 수업 시 과업 이행은 우수했으나 숙제를 여러 번 해 오지 않았다. 숙제 항목에서 점수를 많이 깎여, C+를 받았다. 수십 개 항목의 평가 기록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이 학생이 왜 C+를 받았는지 설명해 주었다. 컴퓨터의 계산은 정확하다. 근거가 명확하니, 이 여학생은 자신의 성적을 수긍했다.


이 여학생은 내가 마음속으로 무척 아끼는 학생이었다. 반수의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잡담을 하거나 심지어 일부러 수업방해를 하기도 하는 교실에서 이 여학생은 언제나 묵묵히 나의 수업을 잘 따라왔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수업 과제를 제때에 완성해 제출했다. 나의 교실에서 언제나 성실하고 예의 바른 학생이었다. 학생들이 고의적인 수업방해로 고통스러웠던 나에게 그녀는 언제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옥에 티는 그녀가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는 것.


이 여학생을 좋게 보던 나였기에 내가 매긴 성적에 항의를 하는 상황에서도 그녀에 대한 나의 호감이 내 얼굴에 드러났던 것 같다. 불만에 찬 표정으로 항의하는 여학생이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 성적에 대한 관심은 학업에 대한 열의를 표현한다. 성적에 전혀 관심조차 없는 다른 학생들을 생각하면, 성적에 대한 항의는 학업에 대한 그녀의 열정으로 보였다.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대했다. 그녀에게 찬찬히 근거 자료를 보여주며 그녀가 C+를 받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 여학생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L아, 너는 수업시간에 태도도 바르고 열심히 잘 참여해서, 참 성실한 학생이라고 생각했어. 수업 참여와 수업 과제 점수는 아주 높은데, 숙제를 해 오지 않아서 점수가 많이 깎였네. 숙제만 잘 해오면 B가 아니라 A도 충분히 받을 수 있어. 너는 똑똑하고 성실하니, 다음번에는 A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실망하지 말고 계속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


학생은 자신의 성적이 문제가 없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숙제를 잘 해오겠다고 약속했다. A를 받을 수 있도록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학생의 성적 항의 문제는 잘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여학생이 교장실에서 나가고 나와 교장선생님이 대화를 이어갔다. 교장선생님과 대화를 하며, 나는 학생의 항의가 나에게는 기회였음을 알게 되었다. 교장선생님은 학생이 성적에 불만을 가지고 항의하는 상황에서 학생을 따뜻하게 다독이며 오히려 격려하고 희망을 주는 나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정확하고 철저한 성적처리, 학생의 특성을 파악하는 능력, 무엇보다도 학생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 드러났다고 했다. 학생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교사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학생의 항의라는 상황이 나의 교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었다. 위기가 기회가 된 반전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 선생님이 K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선생님의 학생에 대한 사랑과 진심이 느껴졌어요. 학생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교사의 아주 필요한 자질입니다. 미국의 공교육은 당신과 같은 교사가 필요합니다. 이 학구를 떠나  다른 학구로 가더라도 계속 공립학교에 남아주세요. 미국의 공교육은 당신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학교를 알아본다면, 내가 기꺼이 추천서를 써 주겠습니다. 우리 학교에서의 선생님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에게 맞는 학구와 학교를 만나, 보람된 교직생활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흑인 여교장 선생님의 말은  격려와 힘이 되었다.  학교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내가 좋은 선생님이라는 자신감을 잃었다.  흑인 커뮤니티에서 버티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실패자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나와의 싸움에서 졌다고 생각했다. 교장 선생님이 보여준 나에 대한 신뢰는 이런 패배의식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교장선생님은 나의 장점을 살린 강력한 추천서를  주었다. 그녀의 추천서 덕분에 다음 학교에서 자리를 잡을  있었다.


흑인 커뮤니티 중학교를 떠나며


흑인 커뮤니티 중학교에서의 나의 첫 수업에서 나를 소개하며 나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 8학년 학생 28명이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케이프 버디라는 아프리카의 섬나라 출신이다. 이주한 지 3년에서 5-6년 된 학생들도 있었다. 이 아이들의 환경을 잘 알기에, 나는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었다.


첫 수업에서 어려웠던 나의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내가 살던 인천의 괭이부리 마을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한국 전쟁 난민으로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부모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10살 어린 남동생을 업고 숙제를 하고 설거지를 하던 나의 모습을 묘사했다. 호기심에 찬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첫날의 만남은 좋았다. 이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이 기도는 이제 더 이상할 수 없게 되었다. 간절히 기도하고, 노력했음에도 내가 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 인내와 노력으로 앞으로 나갈 때와 극한에 닿아 물러 날 때가 있음을 배웠다.


이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고, 항상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 준 아이들이 있었다. 내 손을 꼭 잡고 함께 하고자 했던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나를 그들 중 하나로 받아준 것은 아니었다. 끝내, 내 손을 잡지 않은 아이들이 있었기에, 더 이상 그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 곁을 떠나야 했다. 이별을 일주일 정도 남기고, 우리는 수업 시간에 Freedom Writers라는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 감상문을 썼다. 우리 아이들과 너무도 닮은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서부의 저소득층 지역 학구의 고등학교에서 범죄와 폭력에 노출되며 생활하는 가난한 고등학생들이 열정적인 선생님과의 글쓰기를 통해 소통하고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그 아이들의 모습, 그 아이들이 살던 동네의 모습이 우리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이 사는 동네의 모습과 흡사했다.


아이들은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의 아이들이 자신들임을 알았다. 영화를 보고 소감을 나누었다. 몇몇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내가 계속 함께 있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나도 영화에서와 같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속으로 말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미 사직서는 냈고 새로 올 교사가 정해졌다. 아이들과 작별을 고했다. 교직 생활 5년 만에 3번째 학교를 떠난 것이다.


첫날 첫 수업에서 내 가슴속에 간직한 바람이 있다.


“학생들이 세상을  바로 보고 해석하고 또 그 중심에 서서 세상의 긍정적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돕는 교사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 학교에서도 사랑과 신뢰 속에 학생들과 좋은 관계 맺기를 소망합니다.”


이 소망이 다음 학교에서 이루어지길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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