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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Apr 02. 2021

괭이부리마을에서 자란 아이

어린 시절의 추억

따뜻하고 성실한 삶이 있는 곳


인천시 만석동 36번지. 초등학교 시절 살았던 동네다. 일명 괭이부리 마을로 잘 알려진 곳이다. 김중미 작가의 창작 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 동네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괭이부리 마을은 나의 유년시절과 사춘기 초엽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이 지역에는 한국전쟁 시 화마를 피해 북에서 남으로 정착한 피난민들이 많이 살았다. 특히, 이 황해도에서 온 피난민들이 많았다. 열 집 중 하나는  황해도 옹진, 연백, 해주, 은율 등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의 가족이나 그 후손이 살고 있었다. 괭이부리마을이라는 이름은 만석부두에 앞에 있는 묘도(猫島)라는 섬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괭이부리마을은 넉넉하지는 않지만 정이 많은 동네였다. 몇 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응답하라 88’이라는 드라마의 인물들과 분위기를 70년대로 옮겨놓은 동네였다. 김치를 담그고 부침개를 하면 넉넉하게 만들어 이웃들과 나누어먹으며 정을 나누었다.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 인심이 넘치는 이웃들이었다. 좁은 골목길에 대문을 마주하는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 모인 동네지만 마음은 풍요로운 곳이었다.


정직하게 땀 흘려 일용한 양식을 꾸려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20여 년 지난 시기, 궁핍의 시대였다. 그런 궁핍의 시대 가운데 더욱 생활이 팍팍한 동네였다. 그들의 살림은 언제나 여유가 없었다. 70년대의 괭이부리마을은 응팔보다 어렵고 힘겨운 삶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괭이부리마을의 하루는 일찍 시작한다. 아직도 어두컴컴한 세상을 밝히는 백열전구가 집집마다 하나둘씩 켜진다. 낮은 지붕의 기와집에 달린 굴뚝에서는 어느새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연탄불에 혹은 장작불에 하루의 양식을 바쁘게 준비한다.


새벽같이 일터로 나서는 부모들. 야근을 하고 귀가하는 부모들. 새벽밥을 짓는 어머니들. 이런 부모님들을 도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아이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삶의 분투가 이른 아침에 가득했다. 괭이부리마을은 부지런함이 하루를 연다. 노동과 땀으로 세상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다.


나의 새벽잠을 깨우는  딸랑딸랑 두부장수의 종소리였다. 종소리는 매일 아침 듣지만, 따끈따끈  만들어진 순두부나 비지를 먹을  있는 것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매일  두부를 먹을  있기를 소원하새벽잠에서 깼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6학년인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엄마가 일찍 새벽일을 나가셨다.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 중이셨다.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하는 어머니를 돕는 것은  남매의 맏딸인 나의 몫이었다. 어머니가 따끈따끈하게  놓은 밥을 푸고 반찬을 놓아 아침상을 차렸다. 동생들과  도시락도 쌌다. 동생들을 깨워 아침을 먹였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나는 집안일을 도왔다. 11살이었던 나는 10살 어린 막내 남동생을 돌보았다. 방과 후 집에 오면 어린 동생을 업고 숙제를 했다. 돌도 안 된 남동생은 봐야 하고 어린 마음에 친구들과 놀고는 싶고, 궁여지책으로 남동생을 업고 이리저리 놀러 다녔다. 아기를 업고 고무줄도 하고 숨바꼭질도 했다. 그러다, 엄마한테 들켜 꾸지람도 들었다. 껑충하게 큰 키에 아기를 업고 고무줄을 뛰고 숨바꼭질을 하는 45년 전의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수십 년 지나니 이것도 아름다운 추억의 한 조각이 된다.


중학교 때부터는 방학 때는 하루 세끼를 내가 해서 동생들을 먹였다. 아버지의 병환은 몇 년간 계속되었다. 가정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머니를 도울 수 있는 일은 방학 때만이라도 집안 살림을 맡아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도시락을 싸고 아침 상을 차리는 일은 어린 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침에 조금 꾸물 거리다 보면 학교에 지각하는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동생들의 소풍날은 몇 배 더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밥을 짓고 재료를 만들어 김밥을 쌌다. 김밥을 말아 수북이 쌓아 놓고 한 줄 한 줄 썰 때의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직도 40년도 더 된 아득한 옛날의 일에 마치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눈앞에 선하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김밥말기의 달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꿈


어린 시절 우리 모두가 즐겨 읽던 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 그중 알라딘과 요술램프는 나의 동심을 사로잡았다. 요술램프를 가진 알라딘이 부러웠다. 종종 상상의 나래를 폈다. “내게 저 요술램프가 생긴다면, 내가 사는 온 동네를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궁전으로 바꿀 거야!”


우리 부모님을 비롯해 동네 어른들은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항상 궁핍했다. 어린 나에게도 의구심이 들었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동네 어른들은 모두 열심히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일한다. 사치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해어진 옷도 기워입는다. 쌀 한 톨 배춧잎 하나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했는데, 살림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보는 세상과 내가 배운 것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일찍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다.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슬퍼 엉엉 울었다. 초등학교 때 60명이 넘는 반에서 1,2등을 놓치지 않았다. 5학년 때부터는 공부 잘하고 선생님께 인정도 받아 학급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1970년대는 회장과 부회장을 학생들이 투표로 선출하지 않고 담임교사가 임명했다. 6학년 1학기 때도 부회장으로 임명이 되었다. 6학년 때도 반에서 1,2등을 유지했고 학급 환경 꾸미기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여학생 중에서는 내가 항상 일등이었다.


2학기가 시작하는 9월 초의 월요일 아침이었다. 넓은 운동장-그 당시 내 눈에는 운동장에 무지무지 넓어 보였다-에 각 학년과 반별로 줄을 맞춰 섰다. 월요일 애국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전체 학교 조회를 서는 날, 1978년도 2학기 학급 임원을 발표했다. 나는 전혀 의심도 없이 내가 학급 부회장으로 연임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웬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운동장의 확성기에서는 내 이름이 아니라 다른 여학생의 이름을 우리 반 부회장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부회장으로 임명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은 나 대신 다른 여학생을 임명했던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주르륵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이건 뭔가 잘못됐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줄곧 여학생 중에 일등을 놓친 적이 없다. 학급일도 앞장서서 열심히 했다. 선생님이 다른 여학생을 선택한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조회가 끝나고 운동장에는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학생들은 행진곡에 맞춰 걸으며 반별로 열을 맞춰 교실로 들어갔다. 행진을 하면서도, 교실로 올라가는 계단에서도 나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확성기를 타고 힘차게 울리는 행진곡을 들으며 울고 또 울었다. 어린 시절 가장 슬픈 월요일 아침이었다.


나중에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다. 성적이 비슷하고 해서 기회를 Y에게도 주고 싶어서 부회장을 교체했다고 하셨다. 어린 나였지만 너무도 어이없는 대답이었다. 선생님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선생님,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1학기 내내 학급을 위해 열심히 일했어요. 매일 방과 후에 남아 선생님 심부름도 하고 학급 환경도 꾸미고, 다음날 아침자습 문제도 칠판에 썼는데요. 공부도 여학생 중 제일 잘했고 부회장으로서의 역할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선생님이 왜 부회장을 Y로 바꾸었는지 알고 있었다. 학교에 자주 찾아오는 Y의 어머니, 그녀가 선생님께 건네는 선물과 돈봉투의 힘임을. 촌지를 할 여유도 없고, 촌지를 하지 않는 부모님. 세상은, 학교조차도 정의롭지 않음을 깨달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와 부정을 너무 일찍 알아 버렸다.


우리 모두의 꿈


아침마다 동생들 도시락을 싸 주고 막냇동생을 업고 숙제를 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곳, 괭이부리 마을을  중학교 3학년 때 떠났다. 아버지의 병환이 완쾌되고 집안 형편이 나아지자 동인천으로 이사했다.


모락모락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 밥 짓는 냄새,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골목마다 저녁이 무르익는다.


괭이부리 마을의 추억은 가끔 머릿속에 새록새록 피어난다. 40여 년 전 그곳에서의 어린 소녀의 삶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50대 중반의 나는 11살 소녀인 나와 이야기를 나눈다. 10살 어린 남동생을 업고 고무줄을 하던 단발머리 소녀는 나름의 꿈을 꾸었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괭이부리 마을 사람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노동하는 사람들,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를 꿈꾸었다.


소녀가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 소녀는 오늘도 같은 꿈을 꾼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 억울한 삶이 없는 세상,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우리 모두의 꿈이 이루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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