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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Jun 26. 2021

평양의 거리, 보스턴의 거리

나는 미국 보스턴에 사는 한국계 이주민이다. 코리언 아메리칸인 나. 부모님의 고향은 황해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40년을 살았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해 17년째 살고 있다. 나는 남과 북, 미국과 다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태생적으로 통일과 평화에 대한 지향을 가졌나 보다. 그래서 였던가. 70년 남과 북을 갈라 온 분단과 우리에게 강요된 적대와 증오를 넘는 시도를 하였다. 그것은 2019년 여름의 방북이었다.


2019년 여름, 나는 평양의 거리를 걸었고 차를 타고 평양의 거리를 달렸다. 평양의 거리에서 시민들의 일상을 보았다. 그들과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구 반대편의 서로의 도시의 거리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일터와 학교를 오가는 이들의 일상, 놀이와 휴식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을 쉽게 마주한다. 보스턴의 거리에서 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보았다.


보스턴에서 17년을 산 코리안 아메리칸의 눈에 비친 평양의 거리는 어떤 모습일까? 보스토니안들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보스턴의 거리는 어떤 모습일까? 평양의 거리와 보스턴의 거리로 독자를 초대한다.


여기 평양 맞아?


2019년 7월 31일. 평양에 도착한 첫날. 우리의 평화자동차는 평양 순안공항을 벗어나 평양 도심으로 달린다. 아직 평양 외곽이다. 논과 밭, 주택이 눈에 들어온다. “계속 혁신, 계속 전진”, “인민 경제의 자립성”이라는 구호도 눈에 들어온다. 구호를 보자, 내가 북에 왔음이 실감이 난다. 북한 당국이 경제개발과 성장에 주력한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는데, 구호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보인다. oo 국숫집, oo 상점… 순우리말 간판들이 정겹다.   


수십층 고층 건물이 즐비한 거리에 들어섰다. 창전거리였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고층빌딩. 화려한 색감의 건물. 개성 있는 건축 양식. “와우! 여기 평양 맞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로만 듣던 창전거리를 직접 눈앞에서 보며 그 위를 차로 달린다. 여기가 평양인지 서울인지 보스턴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을 겪은 직후 방북했던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평양은 회색 콘크리트의 침울한 도시였다고 했다. 그러나, 내 눈 앞에 펼쳐진 평양은 현대적이고 화려하고 역동적인 시가의 모습이다. 눈부신 발전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변화하고 있는 평양”의 실체를 눈앞에서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평양의 창전거리는 북한이 김일성 주석 100돌이 되는 2012년을 계기로 건설한 거리다. 20층에서 45층 높이의 고층 아파트와 원통형의 인민극장, 아동백화점과 학교 및 유치원, 탁아소, 각종 편의시설과 공원이 창전거리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화사한 색감의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여명거리다. 퇴근길의 평양시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양산을 받쳐 든 여인들. 삼삼오오 걷고 있는 여학생들.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현대적인 도시, 평양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층 건물이 즐비한 평양 도심에서 마주한 북한 동포들의 모습은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우리와 똑같이 생긴 동포들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분주해 보이는 거리 풍경이다. 우리네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나 역시 반공 반북 교육을 세게 받은 세대라, 북한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어둡고 활기 없는 회색빛의 도시다. 내가 알고 있던 평양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생동하는 도시, 평양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생동감이 넘친다.  

 

려명거리는 2017년 4월에 완공된 평양의 신도시다. 70층짜리 초고층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선 려명거리에는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들과 과학자, 그리고 려명거리 건설로 집이 철거당한 사람들이 먼저 입주했다고 한다.  


류경, 버드나무가 아름답게 드리워진 평양. 그 거리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내 앞에 펼쳐진 평양의 표정은 정말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퇴근길이어서인지 차도는 전차, 버스, 택시, 승용차 등이 뒤섞여 있다. 차도에 차가 꽤 빽빽하다. 인도에는 전차나 버스를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자연스러운 웨이브의 머리에 핀을 꽂은 여성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 머리 스타일이 유행인가 보다.


7월 여름, 평양의 오후는 뜨거웠다. 그래서인지 양산을 쓴 여인들이 유난히 많다. 맵시 나는 스커트에 멋스러운 샌들을 신고 있다. 우리네 여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휴대전화를 들고 통화하며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살아 숨 쉬는 평양의 거리다. 이 모든 것은 차로 이동하면서 차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이다. 차 안에서 그들의 얼굴 표정을 보았다. 우리 남녘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 민족의 동질성은 너무도 쉽게 거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70년을 헤어져 살았던 우리 북녘 동포들의 삶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더 설레어 온다.


평양의 거리 카페, 빙수 매대


차창 너머로 흰색 상의와 검은색 치마를 입은 단발머리의 여학생들이 보인다. 8월의 태양 아래 종일 달구어진 보도블록 위를 걷고 있다. 흰색 챙모자를 살짝 얹어 쓴 여학생들의 얼굴이 여름의 열기에 발갛다. 챙모자로는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흰색 양말에 굽이 낮은 샌들과 운동화를 신고 있다. 앳된 모습이 고등학생으로 보인다. 백팩을 메고 하교하는 모양이다. 멋스러운 체크무늬의 원피스를 입은 20대 여성이 양산을 받쳐 들고 뒤를 따른다. 양산을 쓴 일군의 다른 여인들도 보인다.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평양시민의 거리 모습이다.


살아 숨 쉬는 평양의 모습을 거리 여기저기서 마주한다. 그중 새로운 발견은 ‘청량음료’, ‘빙수’라는 간판이다. 거리 이곳저곳에서, 거의 20m 간격으로 청량음료와 빙수 매대를 보았다. 오늘 아침 대동강 변에서도 여러 곳 보았는데... 흠... 저것이 무엇일까?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우리의 평화자동차는 아파트가 즐비한 동네를 지난다. 시민들이 옥외 테이블에 앉아서 무언가를 먹고 있다. 그리고 ‘빙수’라는 간판과 매대가 보였다. 아, 여기도 빙수네! 마침 그 앞에 차를 세웠다. 안내원이 근처 사무실에서 안경을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리 선생님, 죄송하지만 5분만 차 안에서 기다려주시라요.” 더우니 나와 있지 말고 시원한 차 안에서 기다리라고 당부한다.


이제 만 하루가 지나,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고 조심스럽다. 안내원의 당부에 따라 얌전히 차 안에 앉아서 차창 밖 빙수 매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매대 안에 하얀 얼음이 수북이 쌓인 그릇이 보인다. 사람들이 둘러앉은 테이블에는 작은 숟가락이 유리그릇에서 입으로 빙수를 분주히 나른다.  


삼삼오오 테이블에 앉아 빙수를 먹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입이 즐겁다. 표정에는 시원함과 만족감이 역력하다. 빙수를 만드는 여성 봉사원의 모습이 보인다. 매대 앞에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시민들도 보인다. 이 모든 장면이 나의 호기심을 계속 자극하고 있다.


그사이 나는 전 세계 평화운동가들이 들어와 있는 ‘평양 카톡 라이브방’에 접속해 나의 새로운 발견을 전했다. 평양 ‘빙수’ 매대! 평양시민의 거리 카페인 빙수 매대의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전송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는 기필코 저 빙수를 먹어야겠다고.” 안내원이 돌아왔다.


안내원에게 청했다. “안내원 선생, 저기 평양시민들이 먹고 있는 저게 빙수 맞지요?” “네, 선생님 맞습네다.” 안내원이 대답한다. “제가 지금 더위에 갈증도 심하게 나고 배도 출출해서 빙수를 먹고 싶은데요. 같이 가서 함께 드실래요?” 최대한 정중히 안내원에게 먹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안 된다는 것이다. 한번 뭔가 하고 싶으면 꼭 해야만 하는 내 성격 상, 그냥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안내원 선생, 왜 안 된다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이유가 대체 뭔가요?” “내가 지금까지 안내한 재외동포 선생님 중에 한 번도 빙수 매대에서 파는 빙수를 먹은 분이 없습네다. 게다가, 길거리 매대 빙수 시식은 일정에도 없지 않습네까.”


이것이 이유라니.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안내원 선생, 그것이 이유라면, 제가 처음 길거리 빙수 매대에서 빙수를 먹은 재외동포가 되겠어요. 그리고, 꼭 일정대로만 움직여야 하나요? 여행을 하다 보면 새롭게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이 생기기 마련이고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일정은 달라질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빙수를 먹는 게 우리 일정에 차질을 주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꼭 빙수를 먹고 싶어요.”

안내원을 설득하기로 작정한 나는 끈질기게 그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내가 힘들게 북녘 땅에 온 이유를 환기시켰다. 북녘 동포의 일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빙수 매대 시식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평양시민들이 즐기는 여름철 먹거리를 나도 꼭 시도해 보고 싶다.


그러는 사이, 전 세계 한인 평화활동가로부터 “불굴의 의지로 빙수 먹방 투쟁!!”이라는 농담 섞인 응원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어쩌면 지금의 안내원과의 의견 충돌은 나의 자유주의가 북의 원칙주의와 만나 그 해결의 접점을 찾고 있는 상황은 아닌지. 그러나, 나의 굽힐 줄 모르는 설득에 드디어 안내원은 자기 뜻을 굽혔다. “리 선생님의 자유주의는 정말 못 당하겠습네다. 빙수 같이 가서 드시자요.” 우리는 이제 빙수 매대로 간다!


초록색 나뭇잎 문양의 귀여운 식탁보가 놓인 둥근 테이블 하나를 차지해 앉았다. 흰색 제복을 입은 봉사원의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얼음을 갈고 있다. 어느새 하얀 눈꽃 송이가 피어오른다. 소복이 유리그릇에 담는다. 그 위에 과즙으로 보이는 액체를 붓는다. 그리고 다른 재료를 하나하나 담아낸다. 안내원은 빙수 세 그릇을 우리 테이블로 가져왔다. 흰색 스푼이 놓여 있는 먹음직스러운 빙수 그릇. 어느새 눈꽃은 과일 단물에 녹아 자취를 감추었다. 수북이 쌓인 다양한 재료 위에 큼직한 아이스크림이 두드러진다. 나는 그 많은 빙수를 게 눈 감추듯이 순식간에 비웠다. 아, 시원하다! 그리고 행복하다! 더위와 바쁜 일정에 지친 나의 몸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평양 길거리 카페 빙수에 반응했다. 빙수 먹방 투쟁은 이렇게 아름답게 막을 내렸다.


그 당시에는 왜 안내원이 처음에 내가 빙수를 먹는다고 했을 때 반대했는지 이해를 못 했다. 나중에는 어느 정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거리 음식이다 보니, 빙수를 먹고 혹시 내가 배탈이 날까 봐 우려가 되었을 것 같다. 또 다른 이유은 북한이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에 기반한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 국가와는 달리, 사회주의 국가에서 재화와 서비스의 판매는 이윤의 추구가 아니라 시민의 복리와 복지에 있다. 빙수 매대의 설치와 운영은 평양의 시민의 복지를 위해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다. 빙수 매대, 재료, 봉사원 모두 기본적으로 국가가 기본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이고 시민들은 아주 적은 돈으로 국가가 제공하는 빙수를 사 먹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가격과는 다르다. 외부인인 내가 여기에 끼어들어 빙수를 사 먹으면, 시장의 교란이 생긴다. 관광객은 북한 정부가 제공하는 이런 공공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안 된다. 그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없이 받는 셈이다. 외부 관광객인 내가 자꾸 먹겠다고 졸랐을 때, 난처했을 안내원에게 미안하다.


평양의 도로와 차


평양에서 맞는 일요일 아침. 차창 밖, 일요일 오전의 평양 시가 모습을 바라본다.  일요일 오전임에도 거리에 활기가 넘친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꽤  많아 보인다. 바쁘게 걷고 있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다들 분주한 모습이다.


파란색 무궤도 전차가 지나간다. 버스처럼 생겼는데 이름이 말해주듯이 궤도 위가 아니라 바퀴로 도로 위를 달린다. 객차 안에 사람들이 빽빽하다. 좌석은 다 차 있고 많은 승객들이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 반대 차선에 만경대와 광양역을 오가는 빨간색 궤도 전차가 보인다.  이 전차도 거의 빽빽이 차 있다. 무궤도 전차와 궤도 전차 모두 지붕 위에  연결된 전선으로 전력을 공급받아 운행한다.


전차는 평양시민의 주요 대중교통수단인 듯하다. 그동안 거리에서 본 전차는 언제나 거의 만원이었던 것 같다. 이 역시 대북제재로 인한 영향으로 여겨진다. 대중교통 수단인 전차와  버스는 낡아 보였다. 한 평양시민의 말에 의하면 버스나 전차는 대부분 30-40년은 족히 된 차량들이다. 고장이 나면 고치고 또 고쳐 쓴다. 제재로 인해 한정된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야 하는 주민들은 만원 버스, 만원 전차에 시달려야 한다. 버스나 전차를 타려면 수십 미터씩 줄을 길게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제한된 물자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북녘 동포들. 대북제재로 인한 고통은 결국 주민들의 몫이다.


북의 교원단체인  '조선교육문화 직업동맹(교직동)' 소속 선생님이 한 말이 생각난다. “북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항상 전쟁의 위협에 있기 때문에 국가방위를 우선으로 하는 산업에 집중한다. 자동차의  경우에는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 전차, 버스가 개인 승용차보다 우선이다.” 실제로, 평양의 도로에서 개인 승용차보다는 버스, 전차, 택시를 훨씬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중교통 수단도 충분하지 않아 주민들의 불편함이 커 보였다.


한국전쟁이 70년 지속되고 있는 상황, 남과 북이 대치하고 북이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은 남과 북의 일반 주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전쟁을 끝내 군비를 줄인다면, 그 혜택은 남과 북 모두에게 돌아갈 것이다. 북녘 동포의 삶은 분명 더 나아질 것이다. 평양시민들은  길게 줄을 서서 40년 된 낡은 전차를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이며 만원 버스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남녘 젊은이들에게는 반값 등록금이 가능할 것이며 소외계층에게 돌아갈 복지 혜택은 늘어날 것이다. 평양의 거리에서 마주한 동포들의 삶에서 이 70년 전쟁을 끝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를 보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펼쳐지는 평양의 거리. 대북 제재로 인해 결핍과 불편 속에서도 열심히 삶을 일구어 가는 북녘의 우리 동포들의 모습을 거리에서 보았다. 직장으로, 학교로, 집으로, 시장으로, 각자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한 분주함이 넘쳐난다. 친구들과 가족과 아이스크림과 빙수를 먹으며 더위를 식히는 모습에서는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보스턴의 거리에서도 볼 수 있는 비슷한 풍경이다. 우리와 많이 다르지 않은 삶의 모습이 평양에도 있다.



여기는 보스턴의 거리


내가 처음 보스턴의 거리를 밟은 것은 1997 7월이었다. 40 여정으로 미국과 캐나다 동부 해안을 따라 행을 하면서 보스턴에서 며칠 머물렀다. 여행자로 찾은 보스턴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서의 역사와 문화의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나는 마치 미국에 있는 유럽의 도시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오래된 건물이 즐비한 거리.  속에 자리한 현대적 감각의 건물과 시설. 고풍스러움과 현대적인 느낌이 공존하는 보스턴은 여행자인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매력에 빠져서인지 보스턴에 가족을 이루어 17년을 살고 있다.


보스턴은 거리마다 미국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유적과 명소, 건물들이 가득하다. 도시 자체가 역사이고 유적이다. 방문객들은 200  밖에  되는 짧은 역사의 미국에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의 매력에 끌린다. 미국의 식민지 시대와 독립전쟁의 유적들을 돌아보는 프리덤 트레일은 보스턴에서 빼놓을  없는 역사 산책 코스다. 보스턴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인기 많은 장소다. 보스턴 커먼을 출발해서 보도에 새겨진 붉은 라인의 프리덤 트레일을 따라 걸으며 미국 독립전쟁의 발자취를 탐구하게 된다.


97년 처음 보스턴을 방문했던  나 역시 이 프리덤 트레일을 따라 주요 유적지를 탐방하며 미국 건국의 역사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유적과 기념물 하나하나에 배어있는 미국인들의 독립을 위한 투쟁과 투혼을 느꼈다. 자유, 평등, 독립을 위한 그들의 전쟁은 식민지 조선의 무장독립투쟁과 어떤 면에서는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영국으로부터 해방한 후, 그들은 침략자로 돌변했다. 약소국을 침탈해 식민지로 삼은 이율배반적인 제국주의 미국의 모습도 교차됐다. 24년 전의 소회다.


보스턴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인 보스턴 커먼 (Boston Common). 나의 보스턴 탐험이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이다.  보스턴 커먼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심 공원이다. 보스턴 중심에 싱그러운 녹지 공간을 조성해 보스토니안들의 휴식처의 역할을 한다. 가족끼리 나와 산책을 즐기고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는 곳이다. 지금은 평화롭고 한가로운 시민의 휴식처로 기능하지만, 슬프고 비참한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보스턴 커먼에서 1817년까지 공개 처형이 이루어졌다. 1650년대에는 마녀 화형이, 1660년대에는 퀘이커 교인들의 처형이 청교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보스턴 커먼은 이런 비극의 역사를 뒤로 하고, 권력에 대한 시민의 저항과 투쟁을 상징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보스턴 커먼은 자유과 평등을 위한 보스토니안들의 노력과 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반전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1969년에는 10 명이 베트남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 보스턴 커먼은 미국 흑인 인권 투쟁의 위대한 지도자 마틴 루터 킹이 연설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평화 반전 집회가 열리는 곳이다. 팬데믹 이전에 한반도 평화를 위한 촛불집회가 여러 차례 열렸다. 코리언 아메리칸들이 보스토니안들에게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함께 손잡고 연대해 달라고 호소했다. 주요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나와 우리의 촛불집회 장면을 취재하고 당일 석간 뉴스에 보도하기 했다. 코리안 아메리칸의 한반도 평화에 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던 그날의 보스턴 커먼을 잊을 수가 없다.


보스턴 커먼은 아이들과 가족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보스턴 커먼의 명물 중 하나인 개구리 연못 (The Frog Pond). 보스토니안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연못에서 여름철에는 수영을 하고 겨울철에는 스케이트를 탄다. 아이와 함께 한 우리 가족의 추억이 어린 곳이다.  눈이 많이 쌓인 어느 겨울날, 보스턴 커먼의 설경을 만끽하고 싶을 때는 보스턴 커먼 바로 앞의 호텔을 잡아 한 겨울 바캉스를 즐겼다.


낮에는 이미  알고 있는 유적들을 둘러보며 미국 독립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와 나눴다.  다운타운 보스턴 골목골목 역사적 장소를 재탐방하고 재음미했다. 보스턴 커먼의 개구리 연못 스케이트장은 아이들의 겨울 천국이다. 개구리 연못 아이스링크에서 신나게 스케이트를 제친다. 얼음 위에서  겨울 추위를 날려버린다. 스케이트를 타다 지치고 배가 출출해지면 찾는 곳이 있다. 보스턴 커먼 건너편 차이나타운이다. 오래된 딤섬 식당에 들러 딤섬을 먹으며 배를 채우  했다.


밤이 되면 까만 밤하늘을 아래 고요한 보스턴 커먼을 바라보았다. 한밤 어둠에 잠긴 다운타운 보스턴을 내려다보며 느끼는 정취는 특별했다. 건국 초기 미국의  모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심의 한가운데서 보스턴 밤의 아름다움에  잠겼다. 별빛 아래 반짝이던 개구리 연못 아이스링크가 머릿속에서 아른 거른다. 이런 경험은 생활의 터전인 보스턴을 새롭게 발견하고 즐기는 시간이 된다.


보스턴의 거리는 다양한 문화공연과 재미있는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생기 넘치는 사람들의 모습과 문화가 공존하는 보스턴의 명물로 단연코 퀸시마켓을 꼽는다. 1826년 세워진 퀸지 마켓은 190여 년 전통을 자랑한다. 이곳에 가면 현대화된 미국 재래시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념품을 파는 노점에서 음식점, 부티크까지 맛집 투어와 쇼핑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퀸지 마켓에 가면 생동감 넘치는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시끌시끌 북적북적. 보스턴 커먼에서 평화시위를 마치고 잠깐 들러 또 다른 삶의 생기를 얻어가기도 한다. 처음 찾은 97년이나 생활인으로 사는 지금이나 퀸지 마켓은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다.


퀸지 마켓  넓은 마당에서는 광대, 마술사, 곡예사, 악사 등의 다양한 공연을 접할  있다. 곡예사의 아크로바트가 펼쳐진다. 아슬아슬 사다리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몸을 360 회전한다. 혹시, 떨어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곡예를 지켜본다. 관중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커스 공연이다. 마당 한쪽에서는 클래식 기타를 연주한다. 선율을 따라 탱고 풍의 음악이 흐른다. 이런 버스킹은 퀸지 마켓 주변에서 흔히   있는 풍경이다.


내가 처음 방문한 보스턴은 다양한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노스 엔드에서 발견한 리틀 이태리. 보스턴 다운타운에서 발길을 노스 엔드로 돌렸다.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이 즐비하다. 벽돌 하나하나에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는 듯했다. 걸어만 다녀도 문화의 정취를 느끼는 기분 좋은 거리다. 노스 엔드는 이태리 이민주들이 정착한 지역이다. 좁은 길들을 따라 이태리 음식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아무 데나 들어가도 이태리 음식의 풍미를 즐길 수 있다.


이태리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노스 엔드에서 발견한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건 바로 보스턴의 전통 재래시장, 헤이 마켓(Haymarket)이었다.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냄새가 풀풀 나는 서민들의 재래시장이 있기 마련이다. 보스토니안들의 사람 냄새가 풀풀 났던 헤이마켓을 기억한다. 마치 내가 살던 인천의 재래시장을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다. 헤이마켓에서는 신선한 생선, 채소, 고기 등을 싼 가격에 살 수 있다. 돌아가신 시부모님 신혼 시절, 두 분은 헤이마켓 근처 노스 엔드에 사셨다. 장바구니를 들고 와 생선과 채소를 사 그날의 저녁상을 차렸던 젊은 시어머니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결혼을 하고 시어머니와 함께 헤이마켓에 온 적이 있다. 시어머님이 하신 말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헤이마켓은 정말 최근까지도 별로 변한 게 없다. 2019년 팬데믹 전, 마지막으로 갔을 때의 모습이 내가 처음 찾았던 97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가미가 싱싱한 생선을 싼 값에 살 수 있는 헤이마켓. 보스턴의 평범한 일상이 있는 곳 중 하나다.


다운타운 보스턴의 모습은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건물들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때와 크게 다름없는 거리 공연과 연주, 풍물을 즐길 수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과거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가 보스턴이다. 전통의 고수. 내가 발견한 미국인들, 특히 보스토니안들의 특징 중 하나다.  팬터마임, 거리의 악사, 퀸지 마켓의 풍경은 처음 관광객으로 방문했을 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크게 차이가 없다.


하얀 회칠을 한 자유의 여신상 모양을 한 남성은 움직이지 않고 한참을 서 있다. 사람이 아니라 동상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다 갑자기 움직여 지나가던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 우스꽝스러운 동작과 표정으로 마임을 한다. 바이올린이나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 모습도 97년이나 20여 년이 지난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미국 나름의 전통을 만들어 가려는 태도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지. 240여 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오래된 것에 대해 가치를 부여해서일까.


전통을 간직하려는 모습은 보스토니안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도 엿볼 수 있다. 보스턴 지역에서는 200년이 넘은 집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나도 미국에 와서 15년 넘게 250년 된 고택에서 살았다. 1771년에 지어진 콜로니얼 양식의 집이다.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하기 4년 전에 건축되었다. 미국의 역사와 고스란히 함께 해온 세월의 흔적을 집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나무로 불을 때 음식을 조리하던 화덕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요즘은 구하기 어려운 너비가 30cm는 족히 될 마룻바닥재가 깔려 있었다. 방문에 달려 있는 손잡이도 100년 전에 만들어진 골돌품이었다. 화덕 옆 벽에 붙은 까만 작은 쇠문을 열면 메이드를 부를 때 썼다는 종이 있었다. 집을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물건이나 부속품들을 보고 만지며 마치  21세기에서 18세기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18세기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200년이 넘은 집들이 우리 동네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부지런한 미국 사람들을 만나는 보스턴 거리


보스턴은 이제 여행지가 아닌 나의 삶의 터전이다. 생활공간으로서의 보스턴은 조금은 다른 의미도 다가온다. 보스턴에 살기 시작하면서 보스턴의 거리는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부지런한 미국인의 모습을 만나는 곳이 되었다.


보스턴에 사는 사람들, 보스토니안의 하루는 새벽별을 보며 시작된다. 겨울이 일 년 중 6개월인 보스턴. 긴 겨울,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은 언제나 깜깜하다. 온 세상이 꽁꽁 언 아침, 영하 20도의 공기에 얼굴을 내밀면 덜 깬 잠이 확 달아난다. 차에 시동을 건다. 아침 6시. 출근을 위해 길을 나선다.  동이 트기 훨씬 전이다. 보스턴 도심을 향해 달리는 도로에는 차들로 가득하다. 건설 관련 공무원이나 노동자들의 출근은 이르다. 5시부터 시작한다. 노란 스쿨버스도 해가 뜨기 전인 6시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학생들의 등교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다. 아들이 중학생이었을 때, 아들네 학교는 아침 7시에 1교시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6시 50까지 등교해야 한다. 이전에 근무하던 학교는 1교시가 7시 20분에 시작했다. 교사는 늦어도 7시까지는 출근해야 했다. 1시간 걸리는 통근 시간을 고려하면 집에서 6시 전에는 나가야 한다. 매일 아침 5시 기상.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일상이 유지되었다.


나는 처음에 아침 6시부터 러시아워가 시작되는 보스턴의 거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에게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는 부자 나라이기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도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왠지 아침의 시작도 느긋할 것 같았다. 나의 상상은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미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미국인들의 부지런함에 깜짝 놀랐다. 보스턴의 아침 거리는 열심히 일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대표한다.


보스턴의 학교나 직장은 보통 7시-8시 사이에 하루가 시작된다. 일찍 시작하는 덕분에 학교나 직장에서의 하루 일과도 일찍 마친다. 일찍 출근하는 미국인들이기에 퇴근 후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거리에서 종종 마주친다. 보스턴의 거리마다 즐비한 카페. 긴 겨울이 끝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패티오를 친 옥외 카페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가끔 거리 카페에서 한잔의 커피를 마시며 동료와 수다를 떨며 하루의 피곤을 씻는다. 거리의 옥외 카페는 가족들에게는 느긋하게 주말 브런치를 즐기도 곳이기도 하다.


주말에는 옥외 카페레서 종종 브런치나 가벼운 점심을 막는다. 한주의 밀린 잠을 몰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난 토요일 오전. 옥외 카페는 가족과 함께 간단히 아침을 해결할  있는 곳이다. 우리가 종종 찾는 카페이자 브런치 식당은 에메랄드 빛의 대서양이 멀리 보이는 항구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레스토랑은 계란, 베이컨, 해시 브라운, 토마토, 감자튀김, 팬케이크, 와플, 프렌치토스트, 샌드위치 등의 메뉴와 신선한 과일 주스,  볶은 커피가 일품인 곳이다. 요트가 즐비하게 늘어서 묶여 있는 작은 항구와 찰랑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브런치는 일주일 노동의 수고스러움을  씻어준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남이 차려주는 밥상이라던가. 워킹 맘이 가족과 함께 하는 토요일의 브런치는 세상  부러운 진수성찬이다. 주말 오전에는 아침이나 브런치를 즐기러 나온 가족들로 거리의 카페와 식당은 붐빈다. 남이 차려준 따뜻한 주말의 아침식사는 한주를 열심히 살아온 이들의 땀과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주중의 보스턴의 거리. 느긋함과 여유가 느껴지는 주말의 보스턴이 거리.  미국 사회의 다양한 얼굴이다. 주말 찰스 강변의 풍경은 다채롭다. 강변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스케트보드를 타는 아이들, 강둑에 앉아 낚시를 하는 가족들... 강 한가운데는 카약과 카누를 즐기는 사람들도 보인다.


오늘 보스턴의 거리를 걸었다. 캐노피 아래 거리 카페에 들러 아이스커피 한잔을 마셨다. 그윽한 커피의 풍미가 입안에 가득하다.  볶은 커피를 갈아 만든 아이스커피는 이제  시작한 여름의 가벼운 더위를 쉽게 달래주었다. 그리고 나의 눈은 보스토니안들의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일상에 머문다. 백팩을 메고 걷는 일군의 대학생들, 아기를 태운 스트롤러를 밀며 산책하는 엄마, 푸들과 함께 산책하는 은발의 할머니,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이번에는 고풍스러운 보스턴의 명물이 거리를 지나간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철, 그린라인의 전동차가 협궤를 달린다. 댕댕댕 종소리를 내며 고풍스러운 보스턴의 운치를 더한다.


2년 전 걸었던 평양의 거리가 생각났다. 이 팬데믹을 평양시민들도 잘 이겨내고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평양과 보스턴, 서로 다른 문화, 다른 언어, 다른 체제 속에 존재하는 도시다. 각각의 도시에서 나름의 삶의 방식으로 오늘도 삶을 꾸려간다. 일상을 꾸려나가는 평양과 보스턴의 거리의 모습은 다르고도 같고 차이가 나면서도 비숫하다. 얼마나 비슷한지 얼마나 다른지를 느끼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두 도시의 거리를 체험한 나에게는 모두 평범한 시민들의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두 나라의 수교가 맺어지고 정상적인 국가 관계가 될 때 두 도시의 시민들이 상대의 거리를 거닐 수 있게 되길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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