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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Jul 27. 2021

버티는 자가 강한 자다

살며 배우며 가르치며 1

A winner is a dreamer who never gives up.

- Nelson Mandela


나는 이주민 가정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한동안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살다 간 위대한 인물의 명언을 함께 암송하며 수업을 시작하곤 했다. 그때 아이들에게 인기 있었던 명언 중 하나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권운동 지도자 넬슨 만델라가 한 "승자는 포기하지 않는 꿈 꾸는 자다"라는 말이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익히고 마스터하는 과정은 꾸준한 노력과 인내를 요한다. 영어 학습의 힘든 여정에 지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하는 격려의 말이었다. 아이들은 다 나름의 꿈을 꾸며  영어로 편안하게 의사소통하는 그날까지 자기 페이스대로 열심히 연습하고 익혔다. 아이들에게 힘이 되는 말이었다.


나에게도 오래도록 힘을 주는 말이었다. 이 명언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나를 다독였다. 나이 마흔이 다 되어 미국에 온 이주민. 40대 중반에 다시 공부해 하버드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만학도. 50을 앞둔 나이에 경력단절을 딛고 미국 공립학교 교사로 일을 시작한 새내기 교사. 이 말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한걸음 한걸음 소의 걸음으로 걸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룰 때까지.  


이제 50 중반. 100 시대를 사니 이제  인생의 후반전  시작했다.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나의 늦깎이 인생 여정을 아는 사람들이 묻는다. 끈기와 노력으로 성취한 것은 알지만 어떻게 가능했냐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냐고.


나는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힘든 과정을  버텼는지 돌이켜 봤다. 옆을 안 보고 앞만 보았다. 작은 산 하나하나를 넘었다. 첩첩이 겹쳐진 산을 다 보았다면, 어쩌면 지레 겁을 먹고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냥 눈앞에 있는 산만 보았다. 하나를 넘고 나니 넘을 만했다.


몇 년의 전업주부 생활을 접고 다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작은 목표를 하나하나 세웠다. 처음에는 대학원 입학에 필요한 영어점수 만들기. TOEFL을 먼저 시작했다. 매일 몇 시간씩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연습을 했다. 듣고, 읽고, 큰 소리로 말하고, 외우고 썼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공부했다. 이러기를 세 달. TOFEL 시험을 보았다. 목표한 점수가 나왔다. 작은 성취는 다음 목표로 향해 가는 기차의 연료가 되었다. 앞서 이룬 작은 성취에 힘입어 기운이 났다. GRE도 어휘, 독해, 쓰기 지겹도록 반복하고 반복했다. 몇 달의 노력으로 원하는 점수가 나왔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 내가 그랬다.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려면 이 험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버텼다.  꿈을 꾸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자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과정은 썼지만 그 열매는 달았다.


읽고 쓰고 외우는 힘겹고 지겨운 과정을 버틸 수 있었던 동력은 눈에 보이는 보상, 점수의 힘 같다. 나는 성적과 점수에 약하다. 상 받고 칭찬받는 것에서 성취동기를 얻는다. 하버드에서 석사 공부할 때, 밤새워 책을 읽고 과제를 했다. 특히, 페이퍼 쓰기 과제는 며칠씩 공을 들여 썼다. 그 며칠은 온통 페이퍼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아이 라이드를 해 주며, 저녁을 지으며 이리 쓸까 저리 쓸까 궁리했다. 머리 속으로는 계속 페이퍼를 쓰고 있었다. 페이퍼를 쓰기 시작하면, 밤을 꼬딱 새우기가 일수였다. 어느새 먼동이 트는 새벽이 왔다. 피곤했지만 피곤한지 몰랐다. 교수에게 받을 좋은 성적과 피드백을 상상하며, 셀렘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최고 점수인 A를 받고 칭찬으로 가득한 교수의 코멘트를 받으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이 맛에 밤을 새우는 고단함도 잊고, 친구를 만나고, 드라마를 보는 재미도 포기한 채 공부에 몰입했던 것 같다.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좋은 성적이 나왔고, 좋은 성적을 받는 보람에 더 열심히 공부했다. 힘들어도 재미있었다. 성적에 대한 기대로 버텼다. 나를 포기하지 않게 했던 현실적이 힘이었다.


미국 교사로서의 생활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근무 여건이나 나의 적응력이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첫 몇 해는 그 긴장과 업무의 강도가 매우 높았다. 매일 크고 작은 도전이 나를 기다렸다. 첫 근무지인 차터스쿨에서는 하루 7시간 이상을 가르쳤다. 수업 이외에도 점심시간과 버스 등하교 시 학생생활지도, 학부모 면담, 서류처리, 교직원 연수 프리젠테이션 등 쉼 없이 쏟아지는 업무에 치이며 살았다. 사춘기를 겪는 중학생들의 반항에 직면해 속을 끓기도 했다. 아시안 선생님이 생소했던 아이들에게서는 인종차별적인 말을 들으며 가르쳐야 했다. 세 번째 학교에서는 체력이 달리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먹고살기 위해 버텨야 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다시 교단에 서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벼랑 끝에 서서 있는 힘을 다해 버텼다. 강한 자가 버티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자가 강한 자다.


포기하지 않는 꿈꾸는 자가 되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때로는 물러서야 살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를 태울 때까지 태워 더 이상 태울 수 없을 때가 왔다.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를 택했다. 난 결국 세 번째 학교를 그만두었다. 포기하지 않은 드리머는 물러설 때는 물러서서 다음의 승리를 기약한다.


버텨냈던 불굴의 의지와 인내는 좋은 평판을 만들어 냈다. 나는 원래 순발력 있고 기민하지는 못 하지만 열정과 노력은 솟구친다. 나의 성실성과 프로페셔널리즘이 통했다. 세 곳의 전 학교 교장들로부터 강력한 추천서를 받아 현재 근무 중인 네 번째 학교의 교사직을 잡을 수 있었다. 버틸 때까지 버티었기에 온 기회였다. 오늘도 강한 자가 버티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자가 강함을 스스로에게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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