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보 Aug 02. 2021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배우는 교실

살며 배우며 가르치며 2

In giving of yourself, you will discover a whole new life full of meaning and love.


—Cesar Chavez




미국에서 가르치며 갖는 특별한 경험 중 하나는 교사가 교육 과정과 교재를 자율적으로 계획하고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임과 노력을 요하지만, 의욕과 열정이 있다면 즐겁게 감당할 수 있다. 나의 신념이나 가치를 교육과정에 반영하고 내가 좋아하는 소재나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나만의 교육과정과 수업을 디자인하는 즐거움을 만끽 할 수 있다. 나는 어느새 책임이 가져다주는 자유를 즐기게 됐다.  




처음에는 좀 겁을 먹었다. 교육과정과 교재 개발. 말자체가 거창하게  들렸다. 계약서를 쓸 때, 3초간 망설였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교사의 업무와 의무 조항 여러 개가 패키지로 묶여 있는 계약서에 사인했다. 나에게 일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 너무도 감사했기에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일단 기회를 잡았다. 일단 시작하고 봤다. 나의 능력을 믿고 뽑아줬으니, 내게 그런 능력이 있겠지. 그들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 나를 선택한 학교를 믿었다. 나 자신을 믿었다. 닥치면 다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시작했다.




ESL 교사로 일을 시작하면서 교육과정과 교재에 대한 재량권을 갖는 것이 큰 축복이었음을 깨달았다.  무엇을 가르칠지 연구하면서  미국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나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됐다. 미국의 역사, 사회, 문화에 대해 공부했다. 내가 추구하는 신념과 가치가 미국 교육과 만나는 지점을 발견했다. 미국 교육이 지향하는 덕목인 자유, 평등, 인권은 나의 철학과 교육자로서의 신념과 맞아떨어졌다. 내가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영역이다. 나는 신이 났다. 나의 20대, 내가 옳다고 믿었던 가치들을 나의 교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펼쳐진 것이다.




인류 공동선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을 바쳤던 미국 역사 속의 인물들을 만났다. 그중 하나가 노동운동 지도자 시저 샤베즈 Cesar Chavez (1927–93)였다. 미국 46대 대통령 조 바이든이 취임식 첫날 그의 집무실에 걸었던 초상화의 주인공이다. 그의 삶을 읽으며, 전태일 (1948-1970)이 떠올랐다.




두 인물은 많이 닮았다. 샤베즈와 전태일은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 한 가난한 노동자였다. 두 인물이 살았던 사회와 시대의 노동의 현실은 너무도 흡사했다. 1950년대와 60년대, 미국 농장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비참한 생활환경에 처해 있었다. 농장 노동자들은 일주일 내내 휴일도 없이 일하며 저임금에 시달렸다. 부상과 죽음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작업환경과 화장실과 깨끗한 식수조차 제공되지 않는 조건에서 일했다. 백열등 불빛 아래 먼지 자욱한 평화시장 봉제공장, 그 안에서 밤늦게까지 미싱을 돌리는 여공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고 불길 속에서 외치던 전태일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척박한 노동의 현실을 깨고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두 노동자는 지구 반대편 각자의 노동현장에서 고군분투했다. 나는 샤베즈를 전태일보다 앞서 활동했던 미국의 전태일로 인식했다.




샤베즈는 큰 역경에 맞서 이주 농장 노동자를 위한 노동조합을 성공적으로 조직했다. 그는 노동운동의 강력한 지도자로 미국 노동운동사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외면당했던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했다. 그는 한국 노동조합 운동의 불씨를 틔었고 그 불씨는 이제 횃불로 타오르고 있다.  두 노동자의 헌신과 희생이 밑거름이 되어 노동자가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대장정에 많은 이들이 함께 하고 있다.




나는 시저 샤베즈를 나의 교실에 초대했다. 그렇게 찾아온 샤베즈는 나의 학생들에게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일깨웠다.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쳤다. 서로의 기대어 사는 우리는 타인의 고통이 결코 타인의 것일 수만은 없다. 타인의 아픔과 절망은 나의 것이고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며 그 아픔의 근원을 해결하려는 태도를 나의 교실에서 배울 수 있기를 소망했다. 시저 샤베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배우는 교실’을 만들기 위한 나의 첫 번째 시도였다.




대다수의 우리는 노동자의 삶을 살아간다. 학교에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교육은 필수적이다. 7학년 학생들이 사회시간에 민주적 시민의 권리 중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샤베즈는 사회수업과 연관되어 딱 맞아떨어지는 선택이었다. 민주주의와 인권과 관련된 어휘와 표현을 학습했다.  “자유, 평등, 권리, 차별, 인종분리, 노동조합, 공정, 정의, 연대” 등의 어휘를 배우며 문장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다.  문장 패턴을 활용해 샤베즈의 성격, 업적,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말하고 글로 썼다.




학생들에게 샤베즈는 새로운 인물이었다. 나와의 수업을 통해 샤베즈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학생들은 수십 년 전 미국의 노동자의 삶과 열악한 노동현실에 경악했다.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고 조직하고 연대했던 샤베즈의 삶에 경탄했다. 학생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을 말했다. 14살의 아이들. 그들은 14년 간 쌓아온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바탕으로 샤베즈의 삶을 헤아렸다. 의미를 부여했다. 14살 학생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아이들의 말을 꺼내본다.




“가난했기 때문에 학교를 끝까지 마칠 수 없었던 샤베즈에게 연민을 느껴요. 그는 8학년, 15살의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농장 노동자로 일해야 했어요. 나보다 1살 많은 나이인데, 나는 상상이 안 돼요. 내 또래의 아이들이 하루 종일 밭에서 고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요.”




”우리가 먹는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는 노동자들이 오랜 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악조건에서 일하고 임금도 제대로 못 받았어요. 그런 부당한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 샤베즈의 행동은 용감했어요. 그의 영향력은 컸어요. 전국 농장 노동자조합을 만들어 노동자의 근무조건과 인권 개선을 가져왔어요.”




“나는 샤베즈의 평화적 투쟁이 좋아요. 부당함에 맞서 목숨을 건 단식까지 한 샤베즈를 존경합니다. 농장 노동자들에게 인간에게 해로운 농약이나 제초제를 살포하게 한 기업이나 농장주들이 나빠요.  농약을 뿌린 노동자들이 병에 걸렸어요. 그런 채소와 과일을 먹는 소비자들의 건강을 해쳤어요. 샤베즈는 사람에게 해로운 농약과 제초제를 농작물에 뿌리는 것을 반대했어요. 단식을 통해 그의 생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어요. 샤베즈는 모두를 위해 용감하게 싸웠어요.  그가 비폭력 투쟁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고 생각해요."




“부당한 일이 생겼을 때 침묵하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어요. 샤베즈가 용감하게 앞장섰기에 다른 농장 노동자들도 함께 싸울 수 있었어요. 그의 용기와 지도력이 멋있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은 1960년대의 캘리포니아 농장 노동자가 처한 노동환경과 생활을 이해하며 그들의 고통에 공감했다. 불의에 저항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인물의 삶의 통해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다.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존중을 배웠다. 용기와 연대의 힘을 깨달았다. 학생들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그들의 언어로 나타냈다. 아이들은 생각과 의견을 나눈다. 보스턴의 교실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 자란다.




전태일의 일대기가 국어나 사회 교과서에 실릴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전태일을 읽고 토론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교실을 그려본다. 전태일이 품었던 숭고한 감정에 대해 글을 쓰는 학생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노동과 노동자를 존중하는 마음과 태도가 자라는 한국의 교실을 소망한다.




작가의 이전글 버티는 자가 강한 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