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나는, 그러나 한없이 따뜻한

우리가 셀린시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by 박자아


셀린시아마의 영화는 여성의 시야가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여성의 시야를 따라가고, 여성적 시야로 바라보며, 여성의 눈으로 대상을 응시한다. 감독의 영화 속 가장 돋보이는 지점은 바로 바라보는 대상의 신체를 ‘조각’ 낸다는 점에 있다.




재단인가, 조각인가?


신체를, 특히 여성의 신체를 조각내 응시하는 것은 꽤나 유구한 역사를 가진다. 특히 남성 감독이 만들어낸 여성 퀴어 영화에서 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캐롤>,<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아가씨>세 영화는 카메라로 여성의 몸을 훑으면서 여성의 얼굴과 신체 일부를 과장되게 클로즈업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특히 <아가씨>의 경우, 박찬욱 감독은 배우를 위해 최소한의 장비와 인원만을 동용하여 베드신을 찍었다는 일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베드신은 끊임없이 회자되었으며, 감독의 ‘배려’와 무색하게 성적대상화를 피할 수 없었다. 이는 여성의 능동성을 제한하고 신체를 왜곡시키는 남성중심사회의 무의식적인 응시를 드러낸다. 남자 감독에게 여성이란 항상 상상의 영역이기에, 상상의 산물로서 나오는 이미지들은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혐오를 담는다. 더불어 애초에 당연한 것을 ‘배려’해야만 한다는 것은 여성 감독이 만드는 여성 퀴어 서사와 남성 감독이 만드는 여성 퀴어 서사가 분명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셀린시아마의 ‘조각냄’은 여성의 육체를 재단하여 품평하고 대상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분할은 여성이 여성을 관찰하고 욕망할 때의 ‘여성적 시각’을 대변한다. 여성을 바라볼 때 얼굴과 상체에 집중하는 남성의 시각과는 달리 여성이 같은 여성을 보는 영역은 보다 넓고 세심하다. 동일한 사랑의 혹은 성적인 욕망일지라도 남성의 카메라는 여성의 관능적인 모습을 담는다. 반면 셀린시아마의 카메라는 여성의 신체 요소를 있는 그대로 담는다. 여성의 몸은 즉 감독의 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워터릴리스>는 감독의 거칠고 서투른 욕망이 돋보이는 첫 장편 데뷔작이다. 다른 것이 아닌 ‘싱크로나이즈드’라는 종목을 영화의 주 소재로 선택한 것 역시 욕망을 직관하는 감독의 시선이 엿보인다.


<워터릴리스>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사랑을 욕망하는 것을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욕망은 ‘뭘 해도 좋으니 수영장에만 들여보내달라’는 마리(폴린 아콰르)의 요구로부터 시작된다. 물 밖에서 관찰하던 마리는 “물속에서 더 잘 보여”라고 이야기하는 플로리안(아델 에넬)의 말을 듣고 물속으로 들어가 싱크로나이즈드 선수들을 관찰하기 시작하지만, 마리는 수면 위의 아름다워 보이는 미소와 달리 볼품없이 파닥거리는 선수들의 하체를 보게 된다. 이 씬에서 마리의 시야는 적극적으로 카메라를 대변하고 있다. 감독은 카메라가 담고자 하는 욕망을 마리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수면을 기점으로 하여 상체와 하체를 분리하여 보여주는 이 씬은 욕망, 혹은 욕망의 대상을 조각내 관찰하는 셀린시아마의 시야가 담겼다.


영화 속의 그 무엇도 대상화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실제로 마리는 플로리안의 몸을 끊임없이 흘겨보듯 관찰한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플로리안을 은밀하게 바라보는 시야는 일종의 대상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만, 카메라는 대상화된 대상을 비추지 않고 바라보는 주체를 비춘다. 마리가 플로리안을 관찰할 때, 플로리안의 몸 한 구석을 비추기보단 쳐다보는 마리의 얼굴이나 눈을 풀숏하여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다. 일반적인 대상화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 대상화에 집착하기보단 인물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조명하는 것, 이가 바로 감독의 카메라가 특별한 지점이다.


조각난 신체와 욕망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정점을 찍는다. 카메라는 노골적이고 집요하게 마리안느(노에미 멜랑)의 시선을 따라간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귀, 포갠 손, 눈동자, 뺨, 입술을 하나하나 스케치하며 그림을 완성한다. 분할된 신체를 이어 붙이는 작업은 엘로이즈를 세심히 관찰하는 마리안느의 욕망을 보여준다. 두 인물이 바닷가에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코와 입을 두른 천은 얼굴의 상부와 하관을 분리함으로써 눈(시선)의 이미지를 부각한다.

그림을 그리는 마리안느의 얼굴을 비추는 (엘로이즈의 음부에 놓인) 거울 씬은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성적대상화의 주요 대상이었던 여성의 음부가,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는 실질적으로 그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닌 집중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라는 하나의 조각은 실로 여성적인 시각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거대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분할의 조각은 관음 대신 세밀한 관찰, 그리고 역동성을 담아낸다. 우리는 인물의 정지되고 부각된 특정한 한 부위가 아닌 존재하고 움직이는 인체의 조각을 발견한다. 이 조각은 영화를 보는 모든 여성의 것이기도 하다.


논외로 셀린시아마는 오버 더 숄더 숏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두 인물, 특히 두 여성 인물을 한 화면에 수평적으로 배치시킨다. 오버 더 숄더 숏 대신 집요한 클로즈업을 보여줌으로써 두 인물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셀린시아마적 응시다.




눈빛과 미소


셀린시아마의 모든 영화의 엔딩은 같은 패턴을 가지며, 다양한 감정의 표출을 가장 절제된 형태로 보여준다.


모든 엔딩의 공통점은 어딘가를 빤히 응시한다는 점에 있다. 그 눈빛은 간결한 동시에 단호함이 묻어난다. 상처와 씻을 수 없는 기억을 주고받는 여성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같이 상대를 떠올리고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던진다. 모든 아픔의 시작은 어떤 형태의 사랑으로 시작되고, 그 결말은 누군가의 성장을 만들어낸다.

<걸후드>의 마리엠(카리자 투레)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엘로이즈는 눈물을 흘린다.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마리엠은 좌절을, 엘로이즈는 그리움을 느꼈을 것이라고 감히 상상해 보자. 이들의 눈물은 그간 눌러왔던 감정의 폭발이다. 영화 속 두 사람은 카메라가 아닌 ‘자신만의’ 정면을 단호히 응시한다.


<워터릴리스>와 <톰보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마리와 로레(조 허란), 엘로이즈는 웃음을 짓는다. 이 웃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해준다. 상처만 남은 첫사랑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알게 된 마리. 여자아이라는 것이 밝혀져 처벌을 받듯 조롱을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존재로든 성장할 수 있게 될 로레.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결혼을 선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그리워하되 앞으로 나아갈 엘로이즈.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옅은 미소라는 간결함으로 응집되어 끝내 감정을 폭발시킨다.


옅은 미소와 감정의 폭발. 잘 어울리지 않는 두 언어의 조합이지만 감독은 정확히 이 지점을 건드린다. 엔딩 숏의 눈빛, 눈물과 웃음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등장인물의 미래는 섣불리 낙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성장의 동력과 의지만은 끊임없이 상상 가능하게 될 것이다. 셀린시아마는 주인공들의 미래를 묘화描畫한다는 점에서 그 특별함을 지닌다.


마지막으로 ‘퀴어’함이란 무엇일까. 이성애자 남성이 만들어내는 여성 퀴어 서사는 과연 퀴어할까? 퀴어가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보단, 당사자성을 가지지 않은 자가 만들어 낸 퀴어 서사가 과연 대중들에게 얼마나 진정성 있게 다가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 싶은 것에 가깝다. 누군가의 삶이 다른 누군가에겐 환상의 영역에 불가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성애자 남성 감독은 여성 퀴어 서사를 만들면 안 된다’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퀴어 서사는 어떻게든 만들어져야 한다. 다만 그 과정은 온기 어린 시선과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 삼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셀린시아마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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