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소리의 영화, 시선의 영화
영화는 한 편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두 개의 스토리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재생되는 극장에선 어김없이 관객의 시각과 청각이 분열되기 때문이다. 맑은 풍경과 비명소리, 윤슬이 반짝이는 강가를 뒤덮는 울음소리. 이것은 완벽한 대비도 대칭도 아닌 기이한 착각에 가깝다.
첫 장면부터 나아가보자. 느릿느릿한 활자가 기어코 넘어가고 칠흑같이 어둡지만 완전한 암흑은 아닌 스크린이 객석을 오래도록 쬔다. 극장은 단 2분 만에 칙칙하고 폐쇄된 전시관으로 변모한다. 검은 화면 너머로 들리는 것은 노래인가 소리인가. 이 영화는 전시하고 싶은 것이 있다. 분명히 있다.
예쁘게 틀어 올린 헤트비히(산드라 휠러)의 머리칼과 바짝 깎은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의 헤어스타일을 보자마자 이들은 분명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부드러운 모피를 두르고 립스틱을 바르는 헤트비히의 어깨너머로 명령소리와 총소리가 울리고, 촉망받는 장교 루돌프 회스가 벗어놓은 군화는 흐르는 물을 붉게 물들일 만큼 피에 젖어있다. 그렇다.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옆에 끼고 유대인들의 비명소리를 반찬 삼아 아름다운 꿈의 낙원에서 유유자적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피해자의 참혹함이 아닌, 우아한 가해자의 생활을 관찰한다. 105분동안 그 어떤 피해자의 승리도, 가해자의 추락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냉담하고 뻣뻣하다. 이 집의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빠짐없이 픽스 숏으로 담긴다. 유일하게 담기지 않는, 아니 담기지 못하는 인물들이 있다면 그건 담벼락 너머 비명소리의 주인공들일 것이다. 처절하게 울부짖는 유대인들은 결코 시각화되지 않는다. 다만 시각과 청각은 철저하게 분열되어 바라보는 관객 앞에 고스란히 놓인다.
소각장과 가스실에 대해 의논하는 장교와 군인은 절대 ‘사람’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단지 ‘이것’ 혹은 ‘그룹’이라는 단어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퉁칠 뿐이다. 비난과 조롱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존재 자체를 부정 내지는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첫째 아들에게 새소리가 들리냐고 물어보는 루돌프의 대사는 실로 괴이하다. 둘을 바라보는 관객의 귓가에는 비명소리만 울릴 뿐이니 말이다. 이렇듯 회스 가족의 삶은 무시와 부재로 가득 차있다. 수용소 겉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라일락과 포도나무를 심는 이들에게 무참히 학살당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은 전혀 들리지 않는 듯하다. 심지어 아우슈비츠를 떠나야 하는 루돌프에게 헤트비히는 ‘이 삶은 내가 꿈꾸던 것’이라며 함께 떠나는 것을 거부한다. 무거운 현실을 마주하는 이들 근처에는 아기자기하게 정원을 가꾸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여인이 있다. 점점 확대되는 아리따운 꽃들은 이내 스크린을 붉게 적시지만, 회스 가족은 이 사실을 결코 사유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집 밖을 나와 수용소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헤트비히는 총소리에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다. 어떤 평범함은 이토록 잔인하다. 카메라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이 평범한 인물들을 조명한다. 바삐 걷는 헤트비히를 따라 수평으로 트래킹 하는 카메라는 과연 헤트비히를 찍는 것일까, 헤트비히 너머의 수용소를 찍는 것일까.
루돌프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한 번씩 멈춰 의문의 헛구역질을 한다. 아픔을 호소하는 것도 아니고 역겨운 냄새를 맡은 것도 아닌 그저 가만히 서서 두 번씩 뱉어보는 구역질과 침. 루돌프의 돌발행위는 영화를 보는 우리의 마음일까. 밝고 아름다운 화면을 보고 있는 우리는 단지 영화가 선사하는 사운드만으로도 울렁거리는 짙은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루돌프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우리 또한 ‘홀로코스트일 뿐이군’, 하며 아무렇지 않게 등을 돌릴 수 있는가? 평범한 일상 뒤의 사회적 비극은 과거이기에 지나치기 쉽다. 수많은 비극을 무디게 지나쳐온 우리에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비극을 스치는 길목에 필히 마주하게 되는 걸림돌과도 같다. 이 비극은 과연 과거인가? 그 어떤 비극도 영원히 기억 저편으로 넘길 수 없다. 증언은 언제든 유효하며 피해자는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외화면 사운드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를 닮아있다. 점차 커지는 쿵 쿵 소리는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 소리를 뇌리에 때려 박듯 각인시킨다. 시각적•청각적 분리는 결국 두 편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두 갈래로 나뉜 영화를 이어 붙여 하나로 이해하는 작업은 끝내 소화되지 못하고 관객 내적의 분열을 일으킨다. 이 영화는 회스 가족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저 차갑게 바라볼 뿐이다. 다만 잠시, 당신에겐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에 차게 식은 시선을 던질 자격이 주어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