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일까?
안녕 la,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는 시간이 흘렀어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살 생각도 죽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폭풍우에 휩쓸리는 것을 반복해 내던 몇 개월이 지나고 애초에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 부서진 배들을 뒤로한 채 맨 몸으로 망망대해에 떠있는 것만 같아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본 것 같은 같은 하늘을 계속 바라보며 누워있는 느낌이랄까
나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가 없고 어디에 다다를지조차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겠어
오늘의 글은 이 이야기의 시작일까 아니면 중간 어딘가일까
그렇게 누워서 같은 하늘, 같은 바다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생각했어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구나
태어난 이래로 한결같이 늘 나는 뭔가를 기다리고 있구나
그리고 그게 참 이상하게 느껴졌어
나는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기다림을 사는 것 같은 기분.
엄마의 말에 따르면 내가 백일 무렵에 말을 했다고 해 걷는 것도 그즈음이랬나 여하튼 보통 아이의 속도와는 많이 달랐다지 엄마는 나를 배었을 때 예지몽을 꾸곤 했데 엄마한테 나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너무도 특별한 아이였던 거야 나는 여섯 살 무렵 영재인증을 받기도 했데 하지만 내 삶은 전혀 다른 맥락으로 특별했던 것 같아 내가 정말 천재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천재성은 유기로부터의 생존에 모두 쏟아부어졌는지도 모르겠어
늘 사랑을 받는 것, 버려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나는, 하루하루가 죽기보다 어려웠어 모든 게 불안했고 위협적이었고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꼈어 내가 나를 지킬 힘을 키울 새도 없이 나는 나를 살려야 했고 굶주린 사자가 사는 집은 사자굴만 같았지
완벽하게 나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서른이 넘은 후에야 버림받는 게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세상에는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기쁘고, 사랑 때문에 아픈 것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나는 여전히 사랑 때문에 아픈 기억을 더 많이 가진 사람으로 살고 있지만 덕분에 사랑이 뭔지는 꽤 많이 알게 된듯해
바다에서 부유하는 삶이라는 것은 참 우습지 나는 그저 떠밀리는 것이 전부인데 모든 게 순서가 있다고 느껴져 내 삶은, 내가 살아가는 이 바다는 양파껍질을 벗겨내듯 내가 미처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만나게 해 분명히 내가 막 이 바다에 태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였을텐데 말야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처럼 만들어 놓음으로써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체험하게 하는 지독한 신의 방식이 다소 지겹기도 한 것 같아
나는 사랑받지 못한 나를, 버려진 나를 사랑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특별하지 않은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만나고 있어 엄마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무색할 만큼 만신창이가 된 실제의 삶을 부끄러워했어 빚을 내어 겉치레를 하고, 때로는 거친 모래라는 현실 속에 반짝이는 알갱이 하나를 기어코 찾아내어 그것만을 남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듯해 보이기도 했어 엄마는 나한테 최고가 될 게 아니라면 시작도 하지 말라고 했어 그리고 나는 여전히 최고가 되지는 못했어
내 인생에서 최고의 무언가를 했다면 그것은 유학이었는데 사실 그조차도 여러 조건들은 붙여서 만들어낸 최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는 어쩌면 그래서였는지 내가 그 학교를 다녔다는 게 그토록 자랑스럽고 뿌듯했는지도 모르겠어 그 성과만을 두고 본다면 나는 엄마로부터 버림받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고, 사랑받지 못할 결격 사유를 모두 제거한 셈이었거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버림받지 않은 마음으로 살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너도 알다시피 그렇지는 않아
유학을 다녀와서도 엄마는 유학이나 다녀왔는데 월급이 그게 뭐냐, 유학이나 다녀왔는데 이 정도 되는 사람은 만나야 한다며 말을 해 그건 뭐 한국에 온 지 7년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런 말을 들으면 여전히 이것밖에 안 되는 나에 대한 죄책감과 동시에 그 시절 그 학교를 다녔던 나만이. 오직 그런 조건이 붙은 나만이 너무도 위대하고 기특해서 내 마음은 자꾸만 그 시절로 돌아가곤 했어 그 짓도 이제는 질린 건지 나는 기어코 특별해질 기어코 최고가 되고 말 미래의 나에게 지금의 마음을 다 보내버리면서 살았던 것 같아
죽고 싶었던 나를 나는 너무 살리고 싶었기에 수년 전 코칭을 만났고, 나는 이러한 나의 상처와, 결여와, 바로잡음에 대한 노력 덕분에 비교적 코치다운 코치로 거듭나고 있어 그 과정에서 영성을 알게 되었고 나는 부유한 영성가가 되겠다고 줄곧 외치고 다니기도 했지 나에게 편안한 옷을 찾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어 하지만 그 옷은 아직까지는 나를 돋보이게 함으로써 먹여 살려준 생각은 없어 보여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먹여 살려줄 불편한 옷을 입은 채 (아니 사실 불편하다고 믿고 싶은)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구해주기만을 그렇게 속절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벗어던지려는 노력도 안 해본 건 아닌데 내가 당장의 내일을 책임지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수차례 단추를 다시 여미다가 벗어던지기를 포기하기도 했지
그래서 말이야, la.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나는 죽어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과거의 나(그마저도 전부는 아닐 테지만)를 결국엔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이제는 미처 사랑하지 않는지도 몰랐던 지금의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파도에 몸을 싣고 있어
지금 내 삶은 삶이 아니라 기다림이라고 여기던 나조차도
과거의 영광도 세상의 최고도 미래의 성공도 아닌 없으면 없는 대로 가진 게 많은 나조차도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이 더 많은 오늘도
더 가지지 못해 서러운 오늘도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나여서 부끄럽고, 특별하지 못해 죄책감이 드는 나조차도
오늘도 무척이나 사랑받고 싶은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렇게 나에게 한없는 사랑을 보내야 하는 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