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력좋은 고무줄 마음은 끊어질 생각도 없이 끊임없이 늘어만나고, 여전히 이해와 감정의 한계를 늘어내는 일은 아프다. 삶을 동사처럼 사는 일에 대하여 생각하게되었다. 그리고 어느순간 삶을 명사처럼 살고있는 것 같은 내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나의 삶은 살아가고 있지않은 삶만 같았다. 어느 순간 돌이켜본 나는 무언가를 행하고 있는 주어가 아니라 무언가가 되어지고 있는 목적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재밌는 행위들을 찾기보다는 나를 수식하는 뻔뻔한 타의들을 탓했다. 나는 드라마속 주인공이 아닌 작가였으며, 나는 작가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한테 있어서 가장 큰 공포는, 내가 믿고있는 일이 진실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올까봐하는 두려움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마도 의심조차 해본적이 없었던 일이 생각해본적도 없었던 실체를 들어낸 순간 나는 당황으로 포장하였지만, 그것은 공포였고 또 그렇게 남아버린것 같다. 그 순간 이후로 같은 것을 겪어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신에 나는 덜 믿는편을 택하고 대부분의 일들이 나랑 상관없는일인냥 경시해버리는 방법을 배워온것같다. 왜냐면 사실은 '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지 '믿다'라는 행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며 믿는다는 동사가 취하고자하는 것은 '진실'이라는 목적어인데, '진실'은 우리가 맞고 안 맞고를 쉬이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실'을 믿는다라고 표현함으로써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게 된다. 그리고 그 간절함이 짙어질수록 공포심은 커져만 간다. 진실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을 '안다'가 아닌 '믿다'로 표현하는 만큼, 진실이 맞거나 틀리거나 나와는 관련없는 일일수록 나는 믿어야할 필요도, 그리고 무언가를 믿음으로써 그 믿음이 깨질까에 대한 그 극심한 공포도 겪어야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진실이 사실이어야하는 집착이 생겨버리면 진실이 사실이어야하는 사실이나 진실보다, 믿음과 불신의 사이가 주는 상처가 두렵다. 그리고 나는 그 불안감을 더는 방법으로 나의 좋은사람(이라는 믿음이 깨질까봐 하는 두려움이 들지 않는, 그 이유가 그 사람이 좋은사람이든 아니든 별로 내게 미치는 영향이 없는 사람이거나, 이 사람은 오랜시간 탄탄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서 진실이 사실로 구십프로 이상 증명된 경우)에게 내가 듣고자하는 얘기를 듣고 마음을 놓아버리곤 한다. 그들이 그런 순간 내게 하는 말은 진실이거나 사실일 필요가 없고, 그들이나 나 또한 그것을 검증하거나 알거나 믿어야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내게 크나큰 안정감을 심어주고 숨을 내쉬게 도와준다. 어떤 사람이 좋은사람인 것과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했다. 좋은사람이나 나쁜사람같은건 없다는 말에 나는 가장 큰 위안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을 좋아하는일도 미워하는일도 힘들다했다. 내게 나쁜사람일 필요가 없는 이는 좋은사람이 되는 것이고, 좋은사람일 필요가 없는 사람은 좋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다만 좋은사람일 필요가 있는 사람의 경우엔 좀 달랐다. 언젠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좋은사람이 사실인 경우에 그사람을 좋아할 수 있게 되고, 좋은사람이 진실인 경우엔 그사람을 사랑하게된다고. 아니 수정하면, 좋은사람이 진실이라고 믿고있는 동안에. 겠지. 좋은사람일 필요가 있는 사람이 생겨버리면, 그 믿음이라는 동사의 늘어난 무게만큼, 그것이 파기될까봐 하는 불안감이 급증한다. 그리고 나는 믿는만큼 은혜로울 것이라는 내 이름의 의미와, 그렇게 살으라는 삶의 숙제에 관하여 딜레마에 빠진다. 상처는 받고난후나, 받는 그 순간보다 받을까봐 걱정하는 동안이 가장 괴롭다. 그리고 나는 그사람을 좋을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하등시키거나, 진실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야 모를 수 있을까하는 어리석은 고심을 시작한다. 내가 믿고 있는 진실이 사실이 될 때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것이 틀릴 때를 대비하기엔 나는 여전히 무방비상태인 것 같다. 그리고 결국에 가장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 나는 제대로 믿는법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대로 믿는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진실이 사실이 될때까지 믿는다는 것. 시크릿을 비롯해 많은 책과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위력을 증명하고 꿈꾸는 대로 되는 세상을 지향한다. 나는 아직 너무 겁이 많아, 끝까지 믿어보는 것을 성취하지 못하고 그 공포심에 꺾여버렸던 것은 아닐까. 가장 무서운 일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만큼의 방안이 어디 또 있을까. 이름대로 살기 힘든 기억을 만들어주었고, 이름대로 살아서 극복해보라는 이 말도안되는 인생의 음모론을. 나는 어떻게, 언제쯤에나 되어야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한번이라도 내 자신을 먼저 배려해볼걸 그랬다. 앞에서도 말한 극소수의 좋은사람 앞에선 내가 나를 배려하지 않아도 그들이 나를 배려해주는 상황이 가능하거나, 내가 나를 먼저 배려하려고해도 그런 나를 배려해주는 사람들이어서 그 앞에선 조금 유치해져보기도 하고, 가끔 든 철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누군가 앞에서 어른스러운 척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 대한 배려고, 그 사람이 친하거나 편하지 않다는 뜻이었을까. 그러고 있는 나를 아무도 배려해주지 않을 때, 그 앞에 있는 사람은 지금의 내게 좋지 않은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나를 의지하고 싶어서 자기 자신을 먼저 배려하고 있던 사람이었던 것일까. 그런면에서 나는 엄마를 영 의지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울고 소리지르고 땡깡 피울 수 있었던 용기도, 무의식이나 무감각도 철든만큼 가능했던 이해의 폭이나 배려의 양 앞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건, 나는 엄마를 의지할 수 있건 없건 의지했다. 엄마를 배려하면서도 배려받길 원했고 가장 내가 어른스럽길 바랬던 엄마앞에서만큼은 어른스러운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수도없이 넌 왜이렇게 철이 없느냐는 말을 들어야했지만,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는게 그렇게 행복한 일이었음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좋은사람일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정말 딱 한번만이라도 그 사람이 아닌 나를 먼저 배려해볼 것을 하는 후회를 한다. 그 사람이 내게 좋은사람이었으면 좋겠는 내 바램이, 그만큼 나로 하여금 좋은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나는 나를 배려함으로서 나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건 아닐까. 그쪽 입장만 그쪽 마음만, 그 순간, 그 감정만 배려해주다보니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있더라. 나를 배려해줄 수 있는 사람 나뿐이었을텐데, 왜 나조차도 나를 외면했던 것일까. 왜 나는 상대가 날 배려해줄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그것까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 사람 앞에서 가장 나다워질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했다. 그 사람 옆에서 그 사람을 어떻게하면 행복하게 해줄까가 아닌, 어떻게하면 내가 행복해질까를 생각하게 될 때, 그리고 그 생각이 서로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것 같다. 어른스러운.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여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이 곧 상대가 행복해지는 방법과 일치하는 관계. 좋은 사람이라는 진실이 사실이 되는 기간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검증은, 그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공통점을 찾는 일이었을까. 내가 내 맘대로, 나편하자고 하는 행동이 그사람의 편함까지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정말 있을까. 나는 지금도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찾는 일보다는 내가 나를 배려하지못하더라도 그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워. 나 편하자는 일 맘만먹으면 할 수 있을텐데, 그러면 상대가 불편해질까봐 맘이 잘 안먹어져, 맘을 먹으면 안될것만 같아. 이렇게 내맘도 맘대로 되지 않는데, 세상엔 참 맘대로 되지 않는 일 투성이더라. 그런데 나는 이런 내가 너무 좋아서 행복하고, 행복한게 슬프고, 슬플 수 있는게 또 행복했다. 사람 관계에 떼 묻는일 참 어렵다. 나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그 위험하고 경솔한 속단을 반복하며 살아가겠지. 똑같이 실망하고 다치면서 서러워하겠지. 다만 최소한으로 '상처받기 전까지 상처받을까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동사를 행하며 살아야겠다. 그게 어리고 약해빠진 김신혜가 사람에 대하여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그리고 새삼. 감사한 사람들이 참 많아졌다.
2012.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