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쓰던 시절

by 그믐

Song: 'Be Good or Be Gone' by Fionn Regan


나는 연필로 무언가를 써내려갈 때의 나의 글씨체를 참 좋아한다. 연필 심이 갈리는 각에 따라서 다른 느낌의 글이 써지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 글을 쓸 때의 내 감정이, 내 생각이 플라스틱 펜보다는 나뭇결을 더 잘 타고 내려간다고 생각했다. 연필을 깎을 때의 사각사각 소리를 좋아했었고, 여전히 칼로 깎는 것은 서툴지만 그 울퉁 불퉁함을 만지작 거리면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문득, 이제는 연필 한 자루 없이 그나마 오랜 시간을 써왔던 샤프 한자루 남아있는 책상 서랍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 그때 쓰던 연필들은 저어기 높은 책장 위 먼지가 소복히 쌓이도록 감히 꺼내기도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렸고, 나는 이러 저러한 ‘연필 쓰던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예전에 한 고등학생 즈음이 었던거 같다. 반에 어떤 친구가 연필을 깎아다녔다. 그걸 보며 아이들이 ‘너 참 착하구나?’라고 얘기했었다. 사실 그 말은, 담배를 핀다고 나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남들이 샤프나 펜을 들고 다닐 즈음까지 연필을 쓴다고 해서 착한 사람인건 아닐텐데, 우린 왠지 모르게그 말에 참 공감을 했었다. 그리고 어느새 필통도 없이 검은펜 한자루만 가지고 다니는게 일상화된 나를 본다. 이 글은 착해지고 싶은 마음보다는 우리가 그 시절 말하던 그 ‘착함’에 대한 회의이다.


참. 이제는 날카롭게 휘갈겨 얼룩만 남기는게 무언가에 대한 지움이 되어버렸다. 북북 찢어버리는 것만이 영원한 소각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버릴 그 모든 것들을 그리고 진하고, 질리도록, 잘난체를 하며, 새겨두는 것이 뻔뻔한 어른이 되었구나 싶었다. 맘에 들지 않는 것들 위로 휘갈긴 줄이나 동그라미들은, 세상 앞에 내운 괜한 자존심으로 애써 가리려던 치부를 더 들어나게 하는 어리석음이 되었고, 그렇게 조각이 나 휴지통으로 간 이야기들은, 지우개 자국위 어림할 수도 없는 기억도 안나는 버린 순간들이 되었다.


연필을 쓰던 때에는 우리는 아무것에도 아직은 서툴지 않은게 없어서, 뭐하나 그리 당당하게 확신에 무언가를 새길수도 없었다. 그리 조심스레 끄적인 것들이 행여나 잘못되었다하면 그렇게 수줍게 지워버리고 더 옳은, 더 나은 것들로 그 자리를 채웠었는데. 고쳐쓰는 이야기 아래로 여전히 남은 그 흔적들이 참 따뜻했었는데 말이다. 연필심이 어느새 닳아버려 두터워진 줄 아래로, 우리는 어느새 새로 깎아온 얇은 글씨로 삶을 메꾸었고,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가 세상에 닳는 것에도 예민하리만큼 관심이 많았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참. 착했었는데 말이다.


펜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필통이 필요없어졌다. 그토록 완고한 플라스틱 덩어리로 어디하나 뭐 흘릴 새 없이, 어디하나 뭐 묻힐 새 없이 그렇게 앞 뒤 꽉 막혀있으니. 그토록 차갑고 단단하게 누구한테도 주지도 받지도 않으려, 그렇게 끔찍하게 모든 것으로부터 방어하며 외롭게 살게 되었는지도 모르니까.


연필 쓰던 시절, 필통을 열어보면, 여기저기 가방 흔들릴때마다 연필심이 긁힌 자국들, 옆자리에 나란한 빨간 색연필이나 아껴쓰던 예쁜 색의 펜들도, 지우개도 그렇게 사이사이를 나누며 함께 누워있었는데. 그렇게 서로에게 눈치보지 않고 흔적을 남기고 자국을 남기며 그렇게 살았었다. 그리고 그 흔적이 좋았던 아이는 지금까지의 나의 오랜 친구가 되었다. 그러다가 연필이 툭 부러지기라도 해도, 우리는 부러진대로 다시 깎아서 쓸 수가 있었다. 그렇게 외롭지가 않았다. 언제든, 계속해서 얘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쾅하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일도 별로 없었다.


어찌 이리 버리는게 쉬워졌을까.

어찌 이리 확신하는게 쉬워졌을까.

어찌 이리 어른이 되었을까.

어찌 이리 외로워졌을까.


우리 연필 쓰던 그 시절에는,

어찌 그리 착했을까.

어찌 그리도 예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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