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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Nov 29. 2019

가스라이팅 II

스물아홉의 연애

그저 살아보는 수밖에 없는 삶처럼, 결단코 퇴고하지 않겠습니다.



A는 Y에게 다른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Y는 그런 A를 보드랍게 품어낼 수는 없지만, 어디를 가든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이지 않음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A가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A의 잘못이 아니다. 물론 Y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우연한 상황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감정 산출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A의 불안감은 더 이상 A의 것이 아닌, A와 Y가 만들어낸 그릇 자체가 담아내야 하는, 책임져야 하는 산출물이 된다. 만일 Y가 이 불안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거나 A를 질책하기 시작한다면, A는 그들의 그릇을 형성하고 있던 조직에 균열을 일으킬 것이다. Y를 사랑할수록, 그리고 Y가 A의 불안감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수록 A는 스스로를 깨부수기 시작할 것이다. Y에게 원망과 미안함을 동시에 가지며, 나중에는 그 원망마저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가스라이팅.


나 역시 스물아홉이 되던 해, 크나큰 방심으로 인한 화재를 경험하게 된다. 이제는 사람 볼 줄 안다며, 이만큼 겪었으니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며 사랑에 빠져들 준비를 했고, 신은 내게 불을 짚일 상대를 앞에 앉혀두고 손가락을 튕긴다. 이 그릇과 같은 그릇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내가 나여서 느끼는 감정들이 수용되지 않은 채, 불쏘시개가 된다. 그와의 관계를 태우며 발생하는 산출물들이 나만의 책임이 된다. 그가 붙인 불은 나를 향하고 나의 감정, 나의 존재까지 모두 태워버리기 시작한다. 나는 그의 가스라이팅에 산산조각 파괴되어 더 이상 그와의 관계라는 그릇을 유지할 수 없다. 그릇은 파괴되고 사랑은 갈 곳을 잃는다.


서른의 연애를 시작하기까지 담길 곳을 잃어버린 사랑이 어디를 여행하다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또 세상에 한 번도 있은 적 없고, 영원히 있을 리 없는 새로운 그릇을 맺는다. 내가 나여서, 그가 그이기에 어쩔 수 없음이 불쏘시개가 아닌 그릇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어루만지며 계속해서 더 튼튼하고 지속 가능한 그릇을 빚어나간다. 


스물아홉. 여전히 사랑을 담기에는 서툴러 스스로를 태우고, 누군가를 태워본다. 그렇게 생긴 상처마저도 언젠가는 각자의 일부로써 사랑받기를. 용서받기를. 세상 어디에도 없는 또 하나의 그릇을 아무렇지 않게 빚어보기를 바란다.


A가 아닌 B였다면 Y에게 어떠한 의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내가 아니었다면 파괴되지 않는 그릇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그릇과 같은 그릇도 세상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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