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잠시 멈춘 듯한 여백을 만들어준다
바쁘고 숨 가쁜 일상 속에서, 비 오는 날 집에 있으면 이상하게도 위로를 받는다.
밖에 있을 때 비는 그저 불편하고 귀찮을 뿐인데, 집에 있을 때의 비는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듯한 힘이 있다.
창밖으로 부서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마시거나, 좋아하는 책을 펼쳐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내 안의 감정이 조금씩 말랑해진다.
잔잔한 비가 내리는 날엔 음악을 틀어놓고 느긋하게 감상에 젖는다.
반면 천둥과 번개가 동반된 날엔 장엄한 음악을 배경 삼아 비와 함께 긴장감을 즐겨보기도 한다.
하루 종일 빗소리를 들으며 보내는 이 고요한 시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방식으로 내게 작은 즐거움을
선물한다.
비 오는 날이면 집 안을 조금 더 정돈하고 싶어진다.
창문을 살짝 열어 빗소리를 들으며 청소기를 돌리고, 습기를 없애기 위해 제습기를 켜둔다.
먼지를 털고 물건들을 제자리에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까지 맑아진 듯하다.
공간이 깨끗해지는 만큼, 마음도 가벼워지는 그런 날이다.
하지만 비는 항상 평화롭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장마철이 되면, 비는 어느 순간 재난이 된다.
폭우에 침수된 마을,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 떠내려가는 가축과 실종된 이웃들.
물이 빠진 뒤에 드러나는 잔해들은 처참하다.
엉망이 된 집기와 진흙 범벅이 된 일상, 무엇보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마음까지.
그 참담함 앞에서, 비를 낭만이라 말하기는 조심스러워진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비가 꼭 와야 할 때만 내리고, 그치길 바라는 순간엔 멈춰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뭄도, 홍수도, 그렇게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자연은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비는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위로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상처다.
나에게 비는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다.
밖에서 맞는 비는 여전히 싫고 불편하다.
젖은 옷과 양말, 꿉꿉한 기분, 뒤집힌 우산은 짜증을 불러오고
그런 날엔 마음까지 눅눅해진다.
하지만 집에 있는 날 내리는 비는 다르다.
그 비는 나를 멈추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가만히 나를 안아준다.
비 오는 날 집에 머무는 그 고요한 시간은, 세상이 잠시 멈춘 듯한 여백을 만들어준다.
그 여백 속에서 나는 내가 놓치고 있던 마음의 결들을 들여다본다.
달려가야만 하는 세상 속에서 가끔은 이렇게 멈춰 서는 것도 필요하다.
빗소리를 배경 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어도 되는 날.
비가 주는 이 조용한 위로 속에서
나는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니, 비 오는 날 집에 있는 시간은 결코 멈춤이 아니라
다시 걷기 위한 준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