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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생각 Nov 20. 2019

나 10

박스 속 청춘




1979년 2월  한판 놀아보자며 태백에서 청춘들은 신나게 한판 벌렸고, 탈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큰소리로 "얼쑤 그렇지"추임새를 뱉어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쉬운 청춘일망정 나에게도 청춘은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사진을 꺼내어 보는 일들은 외롭고 힘들고 그리울 때 울 준비를 하는 슬픈 짓거리이다.

후회가 밀려와서 속앓이를 할 때 사진 속 내 모습은 너무 해맑아서 그것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과  형제들에 대한  보고픔과 그리움보다도 그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막내라는 아이가  안쓰럽다. 후회만이 가득한 마음으로 남아서 사진 속 엄마와 가족 모습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눈빛 같고 그것이 더  슬펐다. 더 깊숙한 마음에서는 날개를 펼쳐보지 못한 청춘시절이라고 할까! 자아정체성이라고는 일도 없었던 내 모습이 싫어서 외면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과거 사진을 보기도 싫고, 사진을 찍기도 싫어하는 사람이 된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무기력하게  대처하지는 않았어야 했다는 강한 다짐과 곱게 키워주신 부모님과 넉넉함을 허락해주신 부모님께 효도 한번 못 해본 아쉬움에 추억 속 사진은 아주 깊숙한 곳에  없어져도 아쉬울 것이 없는  앨범 속에서 빛도 바래고 세월만큼 낡은 모습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사진은 딱 40년 전  1979년 2월이라고 적혀있다. 대학시절은 아니고 예술을 전공한 나는 이수자 자격으로 탈춤을 시작했고 대학가에서 탈춤 붐이 불던 시절이다. 대학생들에게 탈춤을 가르쳐주는 선생님 자격으로 많은 대학생들과 탈춤을 췄다. 명문 대학 국악과 진학을 실패하고 서강대학교 탈춤 동아리에 갔던 기억이 있다. 똑같은 나이에 대학을 다니며 동아리 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부러운 것인지 나도 모르게 멍하게 장구통을 두드렸다. 그때에도 내 마음은 편치 않았나 보다. 그래서인지 나는 늦게라도 대학을 갈 수 있었다.


남자들과 함께 추는 탈춤은 멋도 흥도 중요하지만 체력도 만만치 않다. 그 덕에 목에 땀띠와 여드름 한 바가지로

얼마나 아프고 창피했는지 모른다. 한여름을 숙대 앞 우태하 피부과에서 가장 아픈 목부분의 여드름을 짜기는 내 비명소리와 옆 침대에 누워있는 남학생 소리가 섞여  차마 들어줄 수 없어서 이를 깨물고 참았다.


사진 속 왼쪽 맨 앞에 뛰고 있는 나. 펄펄 날랐다. 남자아이들을 이겨 볼 끼라고 높이 더 높이 뛰어올랐다. 또 가르치는 입장에서 멋지게 잘하고 싶었을 거다. 폼생폼사 시절이니 오죽했을까. 뭐 그리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목숨 걸고 이기려 했는지 이래서 청춘이다.


22살의 그곳은 남자가 더 많았다. 남자들도 힘들어하는 사자탈도 써보고,  남자들에게 질세라 뛸 생각만 했지 연애의 마음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저 어떤 것도 지고 싶지 않은 청춘이었다. 젊은 열기가 가득한 이곳에서도 쉽지 않은 자리싸움에 나는 물러났고, 오른쪽에 뛰고 있는 친구 혜경이는 오래도록 탈춤을 했다. 그때도 나는 정의로움에 불탔고, 아마도 나는 형사나 경찰이 딱 맞는 직업이었을 것 같다.


추억 속 사진을 보며 목이 칼칼하고  눈가도 촉촉해지려 한다. 말없이 자판기를 두드리는 내 모습이  40년 전 지난 시간들은 여전히 아쉬움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팠던 마음이 아물었다기보다는 그저 보듬고 살아간다. 추억은 아픈 것고 아쉬운 것고 아름답게 포장이 된다. 그 시절이 그리워서 섭섭했던 이들도 어린아이처럼 용서도 된다. 그것은 되돌아갈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기에 이렇게 해서라도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사랑과 위로 수단이다. 그리고 청춘을 뭉뚱그려 아름답다는 박스에 넣고 리본 줄로 살짝 묶었다 풀었다를 반복한다.


전화벨이 울린다. 며느리가 "어머니"라고 부른다. 슬쩍 흘린 눈물을 포장지에 닦으며 받는다. 


2019년 08월 16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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