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부터 가족과 함께한 도쿄 여행 - 시리즈 1
언제부턴가 내 일상은 무채색이 되어버린 듯했다. 잃어버린 것도, 특별히 얻어낸 것도 없는데, 마음 한구석은 자꾸만 공허했고, 그럴수록 매일 밤 맥주 한 캔에 유튜브를 곁들이는 생활이 당연해졌다.
“난 괜찮아”라고 혼자서 토닥이는 말이 습관처럼 튀어나오지만, 사실은 그 밑바닥에서 무기력과 우울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자주 즐겨듣던 80-90년대 일본 음악이 내 유튜브 알고리즘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어느새 내 화면 가득 오사카 뒷골목 이자카야, 도쿄의 북적이는 거리 같은 일본 여행 영상이 빼곡해졌다.
그 이미지는 단순한 눈요기가 아니라, 내 안에서 뭔가를 '탁' 하고 깨우는 불씨가 되었다. 일본 특유의 레트로 감성과 이자카야의 따뜻한 분위기는, 미국에서 20년 동안 학업과 일, 그리고 육아만 해온 내 생활과는 전혀 다른 온기를 주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일본을 갈망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한국에서 자라면서 나도모르게 스며들어있던 일본감성, 어릴적 지하상가에서 사서듣던 음악, 만화책, 그리고 미국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 감성,
미국에서 보내온 세월 속에선 더더욱 찾기 어려웠던 일본만의 ‘감성’ 아니 '갬성'.
문제는 거리였다. 미국에서 도쿄까지는 14~15시간 비행이라니. 누군가는 말하겠지. “느낌 하나로 그렇게 먼 길을 가려고?” 하지만 난 이미 마음먹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기력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모험쯤은 해볼 만하다고. 그리고 이시간을 함께 버텨준 가족과 함께라면.
때는 7월, 덥고 습하기로 유명한 도쿄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도전’이 필요했다. 환전? 귀찮았다. 그냥 달러 1,000불 들고 공항에 가서 엔화로 바꾸면 되겠지. 물론 혼자가 아니라,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다. 처음 일본여행이라 약 5일만 머무를 생각이었고, 카드를 사용하면 된다 생각했지만 아뿔싸, 일본은 현금만 받는곳이 아직도 많다는것을 유튜브를 통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도쿄행을 결정하고 가장 먼저 착수한 건 여행 일정 짜기. 예전 같으면 서점에서 여행책 뒤적였겠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미 유튜브가 출발점이었으니, 그대로 가이드 역할도 맡겨버렸다. 자주 보던 일본 여행 유튜브 영상들을 틀어놓고, “저기 좋겠다!” 싶은 장면마다 캡처. 그 이미지를 구글 지도에 하나씩 표시해가며 동선을 짰다. 이상하게도, 영상을 너무 많이 본 탓인지 실제로 도쿄에 가본 적이 없는데도 ‘거기, 좀 알 것 같아’라는 기분까지 들었다.
숙소는 아사쿠사로 정했다. 일본 여행이 처음인 내게, 아사쿠사는 ‘일본스러움’과 ‘관광객 친화적’ 분위기를 동시에 갖춘 곳 같았다. 게다가 24시간 하는 돈키호테가 가까이 있으니, 시차 적응 못해 새벽에 깨어나도 갈 데가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시작은 아사쿠사가 딱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나리타 공항에 내려 전철을 타고 아사쿠사로 향했다. 전철역에 내려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길, 문득 센소지(浅草寺)가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마치 시간과 공간이 멈춘 듯 숨이 턱 막혔다. “아, 드디어 왔구나.” 낯선 골목길, 오래된 상점, 그리고 나카미세(仲見世) 상점가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설렘을 잔뜩 부풀렸다.
거리 곳곳에서 나는 음식 냄새와 사람들 사이를 살랑대며 걷다 보니, 정작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이나 걸려버렸다. 센베 굽는 구수한 냄새, 타코야키를 만드는 찌끗찌끗 소리, 어깨를 부딪치는 인파가 나를 재촉했다. 얼른 호텔에 짐 풀고, 이 거리를 더 마음껏 누려보고 싶었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캐리어를 펼치고, 곧장 뜨거운 물에 피로를 씻어냈다. 15시간 비행에 후끈한 습도까지 더해져서 온몸이 녹초였는데, 샤워 한 번에 그 무거움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창밖을 보니 아사쿠사의 풍경이 아른거렸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흥분 어린 설렘과 함께, 무기력의 껍데기를 조금씩 벗겨내는 내가 보였다.
도쿄에서의 시간은 그저 짧은 휴가가 아니었다. 코로나 시대로 무뎌진 감각을 깨우고, 가족과 함께하는 순간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한국도, 미국도 아닌 제3의 공간 일본에서 발견한 레트로 감성은 내 마음에 새로운 빛깔을 더해주었다. 지난 10년 동안 일만 하며 달려온 나에게, “이제는 좀 쉬어가도 돼”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리고 그 작지만 단단한 메시지는,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에 든든한 지침이 되어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