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unded Healer

상처 받은 치유자

by 바보

직업이 의사라는 게 우연한 계기로 소문이 나면서 그때부터 동네 주치의가 되어 밤낮으로 의료봉사를 한다는 이야기와 목사님인 친구가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에서 무단횡단을 하다 한 교인의 눈에 띄어 입방아에 올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절대 절대 내 직업에 대해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하다못해 동네 구멍가게에 가도 기본적인 호구조사를 하는 게 우리의 정이고, 세계 어딜 가든 어떤 일을 하는지를 기본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게 typical social talk의 패턴이기에,

[무슨 일 하시는지요? > 건설업에 있습니다. > 요즘 건설 경기가 안 좋다던데, 어떠세요? or 저도 한때 건축가를 꿈꿨었지요. or 우리 매형이 현대건설 CEO입니다. 아니 이런 인연이!]

[직업이? > 의사입니다. > 저도 한때 꿈이 의사였습니다. or 요즘 편두통이 심한데.. or 우리 사촌 형이 삼성의료원에 있습니다. 아니 이런 인연이!]

피하려 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또 다른 아이덴티티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브런치에서 자유롭게 글을 쓰기 위해 JADE라는 필명을 쓰는 것처럼.

말하자면, 유재석이 '유산슬'이 되고 이효리가 '린다G'가 되는 것처럼.


나의 부캐는 상담가다. 거짓말하는 것도 아니고, 대충 흉내만 내는 것도 아니다. 영업만 하지 않을 뿐 자격증도 있으니 큰 양심의 가책 없이 나를 상담가로 소개하곤 한다.


직장생활을 하다 뜬금없이 상담 대학원에 진학해서 '상담가'라는 부캐를 얻게 된 사연은 이렇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얻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허탈하고 정신적으로 피폐했다. 인생이 '대입과 취업'이라는 목표를 향한 단거리 달리기인 것처럼 불사르듯 살아오는 동안 진짜 내 영혼이 불타버린 건지, 아니면 애초에 목표 자체가 틀렸던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엄마 말처럼 사춘기 없이 순둥순둥 하게 청소년기를 보낸 나머지 다 늙어서 오춘기가 세게 왔던 건지 모르겠다. 이유야 어쨌든 내 마음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확실하게 느꼈다. 하지만 사회적 눈이 있기에 함부로 정신과 상담을 받을 수 있나? 대신 택한 방법이 상담 대학원 진학이었다. 퇴근하자마자 집에 가서 발 뻗고 쉬어도 피곤할 몸을 이끌고 야간대학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얼마나 고되겠는가? 하지만 그만큼 절박했다.


대학원 첫 강의는 오리엔테이션이었다. 교수님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씀하셨다.

1. 상담을 전공하는 사람들 중에 마음에 병을 가진 사람이 많다.

2. 원래 아픈 사람이 건강에 관심이 많은 법이다. 암에 걸리면 저절로 암에 대해서는 의학박사가 되는 법이다.

*이쯤에서 우리들은(대학원 동기) 동병상련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3. 본인의 마음을 치료하러 왔다 해서 숨길 필요가 전혀 없다.

*이 부분에서 나는 엄청나게 뜨끔했다.


4. 본인의 마음이 치료되지 않았는데 타인을 치료할 수는 없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을 치료하는 게 우선이 되는 게 합당하다.

*우리 모두는 엄청나게 끄덕이고 있었다.


5. Wounded Healer, 상처 받은 치유자라는 말이 있다. 심리적으로 소화가 잘 안된 옛 상처가 혼란을 가중시키고 각종 심리적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들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바로 비슷한 상처를 잘 소화시킨 Wounded Healer다. 그러니 대학원을 수료할 때쯤에는 여기 모인 모두가 상처 받은 치유자가 되어있으리라 생각한다.

*한 단어가 들어와서 박혔다. Wounded Healer! 상처 받은 치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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