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여행기

by 바보

애초에 여행기는 쓰지 않으려 했다. 프롤로그나 에필로그는 나의 감상이니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내 마음이지만, 여행했던 그 시간은 '실제'이기에 나의 지엽적인 기록과 편협한 해석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훼손될 수밖에 없다 생각해서 애초에 쓰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우선 여행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을 일일이 기록할 자신이 없고, 아주 아주 긴 시간을 들여 일일이 기록한다 해도 그날의 모든 것을 온전히 표현할 자신이 없다. 단 한 장면 만이라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나 스스로를 대 문장가라 자부하겠으나, 아쉽게도 나의 글 솜씨는 졸렬하다. 그런데 독자 가운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만 있고, 정작 알맹이가 없음에 당황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하염없이 기다리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그런 분들을 위해 나름의 해명은 있어야겠기에 글을 남긴다.

여행 후 일체의 기록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글을 좋아하기에 최소한의 글로 나만의 기록을 한다. 글로 기록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졸렬한 글솜씨로 여행의 실제를 훼손하고 싶지는 않아서 단편적인 사실들만 기록한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스냅사진의 역할을 하는 메모 형식의 글을 남기는데, 사진 속 한 장면을 보며 그 당시의 분위기, 날씨, 기분, 소리, 향기, 나누었던 이야기, 함께한 음식의 맛 등을 줄줄이 끌어올리듯이, 메모를 보며 그 날의 일들을 떠올리곤 한다.


이탈리아 여행 때 했던 여행 메모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아침부터 무척 배고픔, 딸기로 배가 안참, 4유로 조식을 먹으려 1층 카페를 찾았으나 영업을 안 함, 그나마 가장 가까운 카페를 찾음, 간판도 없고 직원은 한 명뿐인 아주 작은 카페, 예쁘고 밝은 기운이 넘치는 직원과 도도하고 세련된 손님으로 인해 이탈리아가 과연 미인의 나라라 생각함, 하루를 지내보니 그 두 명이 특히 예쁜 케이스였음을 알게 됨, 피스타치오 크림이 가득 든 빵이 맛남, 착즙 오렌지 주스도 굉장함, 비가 와서 집에서 쉬다가 10시쯤 집을 나섬, 베로나 카드 구입, 아레나 근처 집 구경,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이탈리안, 콜로세움보다 수십 년 앞서 지어진 아레나의 기원, 이탈리아에서 4번째로 큰 규모, 시민들의 즐거움을 위해 도시 외곽에 지어짐, 줄리엣 발코니 구경, 토속음식을 판매하는 유명 식당에 예약 없이 입성, 하우스 와인, 환타 오렌지맛 식전주, 짜장 장조림 느낌의 말고기, 강원도 옥수수 국수 질감인 파스타, 배 와인 조림 디저트, 전망대, 두 개의 성당, 맑은 물이 흐르는 강, 삼바 열정으로 사진을 찍는 브라질 아저씨, 언덕 위 성은 보수 중, 진저 커피는 자판기 커피맛, 미사 중인 성당, 천사와 거지, 운전이 거친 이탈리안, 멋진 다리와 박물관. 개보수 과정에서 빛바랜 과거의 벽화를 전시, 시각장애인을 위한 그림, 탄성이 절로 나오는 야경, 밤이 되면서 추위가 사라짐, 라면과 김치, 식사 후 잠.'


이 날의 메모를 예시로 든 건, 그나마 이 날의 메모가 남들이 보기에도 이해가 될 듯싶어서이고, 대부분은 나만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지나치게 함축되어 마치 암호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메모들이다. 아들과 함께했던 프랑스 여행은 심하게 압축되어 '크로아상, 매일, 우산, 교통패스, 파업, 비바람, gps먹통, 길 잃음, 진짜 여행, 다 큼, 서운' 뭐 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굳이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그날 아침에는 크로아상을 먹었다. 갓 구운 크로아상은 기대 이상이었다. 빵이라면 질색을 하는 나인데, 이렇게 맛있는 크로아상이라면 매일 아침 먹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소매치기가 염려되어 돈은 조금만 챙기고, 교통 패스와 작은 우산만 챙겨서 나왔는데, 갑작스러운 철도 파업으로 숙소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우산을 챙겼다는 사실이고, 슬펐던 건 바람이 심하게 불어 가져온 우산이 별 소용이 없었다는 거다. 날씨가 안 좋아서인지 지도 어플은 위치를 못 찾고 계속 이상한 길을 알려줬다. 그래도 달리 의지할 곳이 없어 오락가락하는 gps에 의존해서 길을 찾으려 악전고투하고 있는데, 마녀의 숲에 갇힌 것처럼 한 시간째 같은 곳을 뱅글뱅글 돌고 있음을 깨달았던 순간의 절망감이란! 낙담한 나를 보며 h군은 말했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진정한 여행은 길을 잃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맞벌이로 인해 방치되다시피 한 h군은 도서관 덕후였다. 국립도서관에서 그해에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이에게 수여하는 상이 있음을 h군을 통해 알게 됐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대견함과 미안함이었다. 독서량이 많아서인지 h군은 나이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그리고 언젠가부턴 h군에게 많이 배운다. h군의 말을 듣고 나니 길을 잃었다는 사실이 절망적으로만 느껴지지 않고 나름 의미 있는 경험으로 느껴졌다. 마음의 여유를 찾자 길이 보였다. 그 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h군의 정신적 지지가 한몫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날의 사건을 통해 h군이 다 컸다 싶어 대견스러웠고, 한편으론 h군이 내 품을 떠날 그 날이 머지않은 듯싶어 조금은 서운했다.'


이 글이 그날의 모든 사건과 모든 감정을 만족할 만큼 완성도 있게 묘사하고 있다면 나는 여행기 쓰기를 마다하지 않겠다. 하지만 내 글솜씨의 졸렬함으로 인해 개미 코딱지만큼도 만족스럽지가 않다. 그래서 안 쓴다. 그러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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