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마 위드 러브]에 대한 과대망상 1, 존과 잭

by 바보

이 영화에는 존 역에 알렉 볼드윈, 잭 역으로 제시 아이젠 버그가 등장하는데 둘은 동일인물입니다. 존의 30년 전 얼뜨기 버전이 잭이고, 반대로 현실과 타협한 골골한 꼰대가 존입니다.


존은 아내와 여행 중 로마에 들렀습니다. 30년 전 이 마을에서 살았던 존은 그 시절이 어땠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사랑에 빠진 철부지였으며, 환상적이었다 답합니다. 그러면서도 로마의 매력에 푹 빠진 아내와 달리 존은 오래된 유적은 오지만디아스의 우울증에 빠지게 한다며 유적지 방문 일정에서 빠지겠다 합니다. 그리고 일행이 유적지를 둘러보는 동안 동네 산책이나 하겠다며 예전 자신이 살던 동네를 서성이다 얼뜨기 잭을 만납니다.


시간이 멈춘 도시 로마의 유적지는 과거를 의미합니다. 유적지 여행에 들뜬 아내와 달리 존은 무언가 마뜩잖습니다. 과거 회상이란 마음을 들뜨게 한다는 아내와는 대조적으로 오히려 우울하게 한다는 존. 과거의 어떠한 기억이 오지만디아스의 우울증을 떠올리게 했을까요?


오지만디아스의 우울증이란 존의 말에 그런 말은 어디에서 들었냐고 아내가 묻습니다. 존은 대답을 피합니다. 존은 그 말을 어디에서 들었을까요? love and young and fool이란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30년 전 얼뜨기 시절 존을 사랑에 빠트린 여자가 했던 말이겠죠. 그 여자가 했던 말이란 걸 어떻게 아냐고요? 30년 전 얼뜨기 잭과 사랑에 빠질랑 말랑하는 그 여자 모니카를 살펴보면 답이 나오겠죠.


모니카는 미친 매력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고, 잭의 여자 친구 샐리의 친구입니다. 예쁘고 재미있어서 남자들에게 무척 인기가 많은 친구라며 모니카를 소개하는데 잭은 이해할 수 없단 반응을 합니다. 하지만 잭이 모니카와 사랑에 빠기게 될 것을 존은 알고 있습니다. 당연하죠. 자신의 과거인데 모를 수 있겠습니까? 결과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과정까지 알고 있어요. 처음에는 작은 호기심이 생기고 그 호기심이 사랑으로 자라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이츠의 소설 구절을 인용하는 모니카를 보며 호기심이 생겨버립니다. 하지만 부정하죠. 오히려 모니카와 어울릴만한 남자라며 자신의 친구를 모니카에게 소개해줍니다. 잭은 다른 남자와 있는 모니카를 보며 질투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후회하고 또 괴로워합니다.

데이트에서 돌아온 모니카와 잭은 와인 토크의 시간을 갖습니다. 모니카 역시 다른 남자와 함께한 시간을 통해 잭을 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존재의 고통에 대한 예민함을 가진 잭 너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음을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이 와중에 존은 잭의 옆에서 끊임없이 조언을 합니다. 모니카에게 빠지면 안 된다, 좀 전에 틱톡 먹는 거 내가 봤다, 그게 무슨 의미겠냐(틱톡은 입냄새를 잡아주는 박하향 캔디입니다), 순수한 척 하지만 곧 너를 유혹할 거다, 너도 모니카랑 자고 싶어서 술수 쓰는 거 다 안다, 뒷일을 감당할 수 있겠냐, 꿈같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냥 개꿈이라고 생각해라, 그게 너를 위한 거다. 이러한 존의 집요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잭은 모니카와 사랑을 나눕니다. 그것도 무려 카섹스.


모니카는 무명 배우였습니다. 잭을 헤어 나올 수 없는 꿈같은 사랑에 빠트린 모니카는 바로 그다음 날 캐스팅 전화를 받고 잭을 떠납니다. 당연히 큰 상처를 받았겠죠. 달콤한 한여름밤의 꿈이 한순간에 끝이 났으니 잭의 상심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존은 또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합니다. 당연하죠. 그리고 비로소 의문이 풀립니다. 30년 전의 그 시절의 기억이 'fabulous and gloomy'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다지도 어울리지 않는 형용사 둘이 어떻게 붙어 있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왜 이 남자의 과거는 기막히게 환상적이면서 우울한 걸까요?


뜬금없지만, 이쯤에서 싸이의 노래 '어땠을까?'를 들으며 각자의 옛사랑을 떠올려봅시다. 한 달 전, 일 년 전 사랑 말고 되돌릴 수 없이 먼 먼 옛사랑을 떠올려봅시다. 사랑이 사랑인 줄 몰랐던 그 시절, 내가 그때 널 잡았더라면 너와 나는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잠들기 싫어하는 애처럼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에 갈급했던 그 시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이 새는 줄 몰랐던 그 시절의 나는 아직도 그날의 맥박소리와 숨소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다 알고 있어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녀를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아요. 현재로 돌아와, 다른 사람 품 안에서 같은 추억을 하고 있는 그녀와 나를 떠올려봅시다. 그 회상이 마냥 행복할까요?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이 fabulous 했다면, 다른 사람 품 안에서 같은 추억을 하고 있는 그녀를 떠올리며 gloomy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시 잭과 존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 봅시다. 존을 먼저 알아본 건 잭이었습니다. 꿈 많은 건축 전공자 잭은 성공한 건축가 존을 한눈에 알아본 거죠. 쇼핑몰 설계사로 부와 명예를 얻은 존이지만, 잭 시절 꿈꿨던 건 쇼핑몰 설계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쇼핑몰 설계로 신문에 난 것을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 않거든요. 누구나 꿈 많은 청년으로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딛지만 대부분 현실과 타협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꿈꿨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지만, 내게 주어진 인생을 그럭저럭 받아들이며 살아가지요. 그 결과에 대해 나름 만족하며 살고 있는 존이지만 가지 않은 길 혹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필연이겠지요. 사랑에 빠진 잭을 두고 모니카가 갑자기 떠나려는 그 순간 존이 나타나 조언을 합니다. 슬프지? 하지만 잘 생각해봐. 이성적으로 생각하라고. 네 여자 친구는 샐리야. 그리고 샐리는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모니카보다 훨씬 좋은 여자야. 너에게 더 어울리는 여자라고. 모니카가 떠난 게 오히려 잘된 일이야. 너 큰일 날 뻔한 거라고.


그렇게 잘한 선택이라면서 존은 왜 30년 전 그녀가 했던 말을 잊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 답을 찾는 과정은 독자님들을 위해 남겨두겠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우디 앨런이 그랬던 것처럼요.


추신: 이 영화에는 여러 다른 빛깔의 사랑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지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내일쯤 기록하려 합니다. 넷플릭스와의 계약이 조만간 끝난다 해서 황급히 본 영화인데 무척 재미있었어요. 독자님도 놓치지 말고 꼭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글의 제목을 기억하시죠? 영화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인 망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부디 오해 없으시길..^^



keyword
이전 09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