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짓, 시간낭비, 헛수고

제8회 브런치 북 프로젝트에서 고배를 마신 작가님들에게 드리는 글입니다.

by 바보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께서 연봉이 높은 직장으로 이직을 하시면서 우리 집 경제사정이 넉넉해졌고, 이는 당장 제 삶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당시로서는 있는 집 자식들이나 할 수 있었던 수영 강습을 받게 되었는데, 일반적인 단체 강습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을 굳이 3~4배 비싼 개인강습을 받았더랬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개인 강습 개념은 선수로 진출하기 위한 준비단계에 해당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엘리트 체육은 매가 미덕이며 성장을 위한 귀한 양분으로 여기는 문화가 팽배했었고, 그 덕분에 저는 맞으면서 배워야 했습니다.

다이빙대에 서서 수면을 향해 몸을 띄우고, 어떤 지점에 이르러 고개를 푹 숙이면 자연스럽게 몸이 새우처럼 굽습니다. 그러면 수면과의 마찰을 최소화해서 입수할 수 있어서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습니다. 다이빙 입수의 성공 여부가 초반 속도를 좌우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반 스피드는 기록 단축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다이빙 입수 훈련을 특히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 [4등]

공중동작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경우에는 물보라가 칩니다. 때론 물안경이 마찰 때문에 벗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레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코치님이 신경질적으로 호각을 삑- 붑니다. 그러면 저는 풀 바깥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맞으러요.

3~4배 돈을 더 주고, 수영 선수할 것도 아닌데, 물이랑 배치기해서 아픈 건 저인데, 맞는 것도 접니다. 애매하게 배치기를 하면 물보라도 애매하게 칩니다. 그러면 코치님도 호각을 불지 말지 망설이고 있습니다. 맞기 싫었던 저는 수경에 물이 잔뜩 들어와 앞이 안 보이고 눈이 따가워도 아닌척하며 바삐 팔다리를 파닥였습니다. 그러다 수경에 물이 찬 게 들키면 또 맞으러 나와야 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나름 재미가 있었습니다. 실력이 늘어가는 게 신기하고 뿌듯했습니다. 척척 잘 해내니 칭찬도 많이 받았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술의 난이도가 올라가고, 코치님의 요구하는 바가 많아지고, 기록 단축을 위한 노력 대비 성과는 줄어들고, 그러면서 혼나고 얻어터지는 날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한 게 아까우니 몇 개월만 더 견뎌보자는 어머니의 회유에 못 이겨 모든 영법을 마스터할 때까지 버텼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후회했습니다. 굳이 괴로움을 버텼어야 할 단 하나의 이유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간 낭비했구나, 쓸데없는 짓 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흘러 스리랑카의 한 대학에 초청강사 자격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에는 8개의 레인이 있는 멋진 야외수영장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50m 국제규격의 수영장이었습니다.(우리나라 대부분의 수영장은 25m입니다.) 파란 하늘을 보며 그 넓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그 행복이란 굉장했습니다! 왜 아무도 이 멋진 수영장을 사용하지 않을까 무척 의문스러웠는데, 세상에!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지 뭡니까?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 세워진 대학이라 수영장은 멋들어지게 만들어놨는데 수영 기술은 전수되지 못했던 겁니다. 세상에! 수영을 제대로 배워둔 게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 처음엔 학생 한 명이 수영을 가르쳐달라 해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열이 되고, 나중에는 수십 명이 되고, 클래스를 둘로 쪼개고, 초급, 중급, 고급자로 다시 쪼개고, 그렇게 학기당 백여 명의 학생을 가르쳤고, 계약된 4학기 동안 수백 명의 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유난히 열심히 배우던 advanced class 학생 몇 명에게는 초급과정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겼었는데, 그중 일부는 나중에 수영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습니다.


단 하나의 예를 들었을 뿐, 제 삶에는 쓸데없는 일, 헛된 노력, 시간낭비, 소용없는 짓이라 여겨지던 것들이 인생의 어떠한 시점에서는 쓰임새가 생겼던 경험이 너무나 많습니다. 살아가는 동안에는 시간낭비로 귀결될 것이 자명해 보이던 순간이 참 많은데, 긴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반드시 어떻게든 쓰이더군요. 영어를 배워두면 영어를 쓸 일이 생기고, 워드를 제대로 익혀두면 언젠가 반드시 활용할 일이 생기고, 영상 편집하는 기술을 익혀두면 어느 시점에는 영상을 편집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 가운데 수영을 콕 집어 예를 든 이유는, 수영을 배우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과 시간은 결코 쓸 일이 없을 줄로 알고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긴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익혔던 경험이기 때문에 도움이 되었을까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일회적이고 일상적인 경험도 언젠가는 쓰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나서 글을 쓰거나 강의 내용을 구성할 때 활용되기도 했고, 경험과 아이디어를 정리하기 위해 만든 블로그를 누군가 보고 일거리를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미드를 보다 주워들은 영단어가 업무 중 요긴하게 사용되는 경우는 빈번했고, 어머니 부엌일을 도왔던 경험이 먼 훗날 자취생활에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콕 집어 쓸모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라도 어떤 식으로든 내 삶에 유익이 됩니다. 무척 무료했던 그 시간은 내게 인내함을 배우게 했고, 무서웠던 경험은 웬만한 일로는 쫄지 않는 나를 만들었고, 다투었던 경험은 나를 돌아보고 인간관계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했고, 불합리한 처우를 당했기에 이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었고, 돈에 쪼들렸던 경험이 나를 부유하게 했으며, 불행했던 그 시간이 있었기에 행복이 행복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지나온 모든 시간이 버릴 게 하나 없고, 일분일초가 모두 의미 있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허비된 시간이 왜 없겠습니까. 매몰비용이 왜 없겠습니까. 다만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시간들은 당장 눈에 띄는 성과가 없더라도 어떻게든 제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더라는 겁니다.


올해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허망한 시간을 많이들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각자의 방법으로 이 시간을 의미 있게 채우기 위해 노력했으리라 짐작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한국사회에서 쉼이 필요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름 괜찮은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쉼에 대한 욕구가 채워진 사람들이 즐거움을 찾아 나섰던지, 넷플릭스가 최대 폭의 가입자 증가율을 기록했고, 플레이스테이션과 닌텐도 등의 가정용 게임기가 매진되어 중고 게임기가 웃돈을 받고 거래된답니다. 출판사 지인의 말을 들어보니 올해 원고를 투고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며, 다들 재택근무하면서 글만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제8회 브런치 북 출판 프로젝트의 결과를 살펴보니 전년대비 크게 증가한 3700여 편의 브런치 북이 응모되었다고 합니다. 이 분들은 아마도 이 시간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내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선택한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10편의 수상자에게는 축하를,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의 작가님들에게는 진심 어린 응원을 보냅니다. 코로나가 집어삼킨 2020년, 많은 이들이 우왕좌왕하며 허투루 시간을 보낼 때 브런치 작가님들은 위기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신 분들입니다. 나의 모습을 과감히 드러내는 용기, 작가라는 미지의 땅에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 기성작가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도전하는 대단한 용기를 보여주셨습니다. 한 땀 한 땀 최선을 다해 글을 쓰고, 하루하루 정성 들여 엮으셨을 그 노력의 가치는 대 작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합니다. 비록 고배를 마셨지만, 힘내십시오.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수영을 한다고 모두 박태환이 되는 건 아닙니다. 또한 박태환이 되지 못함으로 그 시간이 헛된 시간이 되는 게 결코 아닙니다. 누군가는 제자를 양성하는데, 누군가는 자녀를 가르치는데, 누군가는 귀한 생명을 구하는데, 누군가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데, 다른 누군가는 삶을 윤택하게 할 취미로, 또 누군가는 해경이나 해군이 되어 꽃을 피우겠지요. 또 누군가는 수영복을 디자인할지도 모르고, 다른 누군가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이는 오지에서 수영장을 발견하고 그곳 사람들에게 수영을 전파하는 일을 감당하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여러분이 브런치에 쏟아부은 그 시간이 예상치 못한 어떠한 형태로, 예상치 못한 어떠한 때에 이르러 꽃을 피울 것을 믿습니다. 세상에 쓸데없는 노력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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