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나 역시 이에 동의하며 나아가 긴 여행 내지는 장기 체류가 더욱 우리 인생과 흡사하다 생각한다.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각자의 인생은 결국 지구별 장기 체류기 아니겠는가.
1년 이상의 해외 체류의 경우 일반적인 여행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특히 시작과 끝이 그러하다. 우선 외국생활의 시작은 다소 암울한 기분인 경우가 많았다. 일반 여행이라면 가장 흥분되고 신나는 시기일 텐데 장기체류의 경우에는 흥분을 자아내는 요소인 '새로움'이 오히려 절망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단적인 예로, 이색적인 음식을 접할 때 여행이었다면 한반도를 떠나 새로운 세계 안으로 들어왔음을 미각으로 여실히 만끽하는 순간이겠지만, 이게 장기체류가 되면 '입맛에 안 맞는데.. 어쩌나.. 2년을 무슨 수로 버티나.. 한국식당은 3시간 거리던데.. 김치 없이 어떻게 사나..' 이런 걱정들이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다. 비단 음식뿐인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있다면 벌레와 공존할 수 있을까 두렵고, 화려한 도시에 가면 삭막한 이곳에서 우울증에 걸리는 건 아닐는지 두렵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는 사회 초년생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울증과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생각한다. 내가 하루 동안 받는 스트레스 총량을 1이라 생각했을 때, 30년 뒤 은퇴할 때까지 예상되는 스트레스 총량은 1*365*30=10950이 된다. 눈 앞에 10950일 치 고난이 첩첩이 쌓여 가로막고 있는데 짓눌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쉽게 말해 군대 이등병의 앞날이 캄캄한 이유와 같다.
장기체류 초반기의 막막함이 어느 정도 적응되면 즐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흐르면 한국에서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이 되고, 여기서 더 더 시간이 흐르면 지겨워진다. 이맘때가 향수병에 걸리는 시기이다. 한국이 얼마나 심심할 틈이 없는 재미있는 곳이고, 세계 각국의 맛있는 음식들이 넘쳐나며, 믿을 수 없을 만큼 안전하고, 기가 막히게 편리한 곳인지 묵상하고 또 묵상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가 되면 달력에 D-day를 표시하고 한국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다 일주일쯤을 남겨두면 마음의 상태가 극적으로 변화하는 새로운 시기가 시작된다. 나는 이 시기를 미련의 시기라 부른다.
미련의 시기가 찾아오면 이 나라를 떠나 한국에 가면 누리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크게 다가온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굳이 오르고 싶지는 않던 설산에 뜬금없이 오르기도 하고, 싼 값에 즐길 수 있는 마사지를 하루에 두 번씩 받기도 한다. 자주 찾던 단골집을 다시 찾고, 한 번쯤 가보리라 찜해두고 잊고 지냈던 식당을 찾기도 한다. 그동안 미루던 지인들과의 약속을 오히려 재촉해서 유언을 남기듯 그동안 표현하지 못하고 쌓아둔 마음을 대방출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출국일이 코앞이라 오그라드는 그들의 손발을 염려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미련의 시기란 말은 편의상 내가 만든 말이지만 인간은 대개 비슷하기에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듯하다. 옛사람들은 메멘토 모리라 했고, 요즘 사람들은 욜로라 한다. 즉, 우리는 언젠가 죽고 그걸로 끝임을 기억하고 상기하자는 말이다. 끝이 있음을 상기하면 우리의 태도가 달라진다. 미적거리는 시간이 극적으로 줄어들고 그 자리에 이순신 장군님의 결단력이 생겨난다. 생즉필사 사즉필생이다! 임전무퇴다!
미련의 시기를 몇 번 겪으며 느낀 바가 있어 그 시작하는 시기를 의도적으로 빨리 시작하려 한다. 두세 달 전부터 미련의 시기를 시작하며 미련을 줄이려 노력한단 말이다. 이를테면 '아마도 나는 마사지를 그리워하게 될 거야. 그러니 오늘부터 1일 1 마사지를 실천하자.' 라던지, '신 과장은 참 고마운 사람이야. 지금부터 틈틈이 마음을 표현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더 가져야지.' 이런 류의 생각을 한단 말이다. 그리고 이를 내 삶 전반에 적용해서 지구별 체류를 마치는 날 미련을 최소화하려 함이 내 인생 전략의 핵심이다. 하고 싶은 것을 미루지 않고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 실천으로 옮기려 한다. 그중 하나가 나의 삶을 스스로 기록하는 것이었고, 꾸준히 실천 중이다. 내 글이 대체로 자전적이어서 때론 일기처럼 느껴지는 이유이다. 때문에 나 역시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런 글은 일기장에 쓰는 게 좋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