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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Kim Apr 08. 2021

기억의 밤, 그리고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기억의 밤이란 영화를 봤습니다. 

넷플릭스에서 그야말로 아무거나 틀어서 본 영화였는데 기대함이 없어서인지 예상외로 재미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시간을 들여 리뷰를 쓸 정도의 대단한 영화라 생각한 건 아닙니다만,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다 너무 똑같은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생각을 기록해두고 싶어 글을 남깁니다.


1. 장항준 감독은 올리버 색스의 책을 읽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 이렇게 똑같을 수 없다. {스포 시작} 끔찍한 살인의 기억을 스스로 지운 사람이 무단횡단도 못할 것 같은 성실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다 자동차 사고의 충격으로 그 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떠올렸는데, 그게 하필이면 베스트셀러 작가의 책 내용과 일치한다? 과연 그럴까?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누군가의 이야기나 창작품이 모티브가 되어 다른 범주로 확장됨은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오랜만에 완전히 몰입되어 감상한 영화였고, 특히 현실인지 환상인지 헷갈리는 상황을 묘사함에 있어 관객도 함께 혼란에 빠트리는 연출은 탁월했다. 


2. 영화에서 진석은 살인의 기억을 잊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만약 살인의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았다면 진석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질문을 바꿔, 지금 내가 저 문을 열고 나가 누군가를 죽이고 다시 이 방에 들어온다면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대답은 No. 하지만 이 방에 들어오다 문턱에 걸려 넘어지면서 하루치 기억을 잃는다면? 그때는 Yes. 살인이 나를 변하게 하는 게 아니라 살인의 기억이 나를 변하게 한다는 말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 수많은 경험의 총합이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과거 경험에 대한 나의 인식과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치매가 무섭다. 죽음만큼이나 무섭다. 모든 기억이 사라진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말할 수 없을 테니까. 육신은 살아서 숨 쉬고 기능하고 있음에도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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